2014년 5월 4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간혹 교회에 대한 실망 때문에 혹은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교회를 떠나 혼자 신앙생활 하고 싶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를 떠나 있다면 정상적인 신앙에서 이탈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회론’입니다. 우리는 이 서신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왜 교회를 허락하셨고 성도들은 그 안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2장과 3장은 불신자로 지내다가 예수를 믿게 된 에베소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교회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아직 교회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하나님께서 교회를 왜 허락하셨는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만 믿으면 되지 마음에 들지 않는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함께 지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교회의 모습을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절에 나오는 가족이라는 개념이고, 두 번째는 20-22절의 성전이라는 건축물 개념입니다.

먼저 가족개념입니다. 19절이죠.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 권속이란 말은 가족 중에도 핵가족이 아닌 대가족을 의미합니다. 대가족은 혼자가 아닌 가족 서로의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것과 가족끼리 서로 책임을 느끼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가족 안에서 우리는 여러 식구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가족 중의 나라고 하는 개념을 배웁니다. 대가족은 수많은 가족들이 서로 부딪치고 부대끼면서 별난 성격과 인격들이 다듬어지고 깨어져서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어지며 나머지 가족에 대한 자신의 책임감을 가지게 되는 훌륭한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도 그렇게 우리에게 전수됩니다. 당시 헬라문화에서는 진리를 배우는데 스승에게 수강료를 주고 그 스승의 가르침만 배우는 학원 같은 개념이 있었습니다.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그렇게 학원 식으로 배우는 죽은 진리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의 교회를 통해 서로 관계하고 서로 부딪치면서 배우는 살아있는 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서로 외인이었습니다. 남이었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업관계나, 이해관계 때문에 잠시 만났다 해도 그 관계가 끝나면 다시 아무런 상관없는 남이었습니다. 남은 보기 싫으면 안보면 되고 말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다가 또 서로 필요하면 말도 할 수 있고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외인이 아니요, 손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권속, 가족으로 묶여진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학원에서 공부하는 식으로,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학원은 자기가 듣고 싶은 과목만 수강하면 됩니다. 백화점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자기 필요한 물건만 구입하면 되는 곳입니다. 점원을 사귈 필요도 없으며, 사장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오직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만 사면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 주위에는 한 교회를 정해놓지 않고 오전에는 이 교회, 오후에는 저 교회, 수요일은 저 교회, 각각 자기가 필요한 것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교회에서 배우는 식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또 한 교회에 다녀도 자기가 필요한 시간에 와서 예배드리고 자기가 필요한 성경지식을 위해서 성경공부도 하고 자기와 비슷한 취향이나 성분의 사람들과의 모임에만 나가는 신앙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 둘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귀찮게 관계를 지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학원의 개념이 아니라 가족의 개념입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절대 상종하지 않았을 사람과도 관계가 지어져, 싫어도 가족이기 때문에 참아내며 그가 변할 것을 기다리며 또 내가 그에게 맞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도 하는,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공통의 사명을 발견하며 서로 동역하며 달려가는 관계로 자라가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서로 얼굴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얼굴을 알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며 서로 세워주는 사이로 성장해야 될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남이라면 싸우지 않습니다.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안보면 됩니다. 더럽고 치사하면 안 만나면 되고 외면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안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나쁜 점은 싸움을 해서라도 고쳐내야 하고 다툼을 해서라도 고쳐내야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가족 안으로 들어오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교회의 개념입니다 (20-22절). 여기에서 우리는 그토록 다양한 환경과 성격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묶여져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어가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도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개념을 뛰어넘어 교회를 성전이라는 건축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어떤 기초위에서 무엇을 향하여 세워져야 하는 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묶여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곧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건축물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건축물로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기초입니다(20절). 기초가 무엇입니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입니다. 여기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는 성경을 말합니다. 만약 교회가 구약과 신약이라는 이 기초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면 아무리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친목단체나 이념단체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그리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워갑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권위를 성경책 한권 위에 두고 있습니다. 그 교회 구성원들이 붙들고 있는 신앙고백도 성경 위에 기초합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삶에서 기초를 이루고 있는 가르침도 신구약 성경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을 누가 말하고 주장해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분명하게 계시를 보고 환상을 보고 무엇을 보고 들었다 할지라도, 또 보고 들은 그 사람이 아무리 진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 없는 것이든지 사도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신뢰하지 않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는 내가 본 천국, 내가 갖다온 지옥, 이런 것들이 교인들을 미혹했습니다. 지금도 누구의 예언, 누가 계시 받은 것, 이런 사람의 경험, 은사들로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이런 것들이 교회의기초가 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특별히 Modern christianity(현대 기독교)는 융합이 유행인데 이것도 교회의 기초를 허무는 작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꾸 사람들이 기독교를 다른 학문과 섞으려고 하고 다른 학문으로 재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좀 지성적으로 보이고 세련되어 보인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다른 학문으로 재해석되어지는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사람이 어떤 대상과 내용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실험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학문의 원리는 이성입니다. 이성의 관찰과 실험과 검증을 거쳐서 이성이 경험하고 이해하여야 진리와 답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이성의 범주 안에서 실험과 연구를 통해 검증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릴 때는 실험이나 검증이 아니라 계시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 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진리인 성경으로 세상의 모든 학문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 바른 것이지 세상의 학문으로 성경을 새로 조합하고 해석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윤리학, 기독교 교육학, 기독교 심리학 이런 것들은 윤리학, 교육학, 심리학이라는 인간의 이성이 이루어놓은 학문을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다시 해석해서 전혀 다른 영역을 창조해야지 그렇지 않고 기존의 윤리학과 교육학과 심리학이라는 내용에 기독교란 타이틀만 붙이는 것은 안 됩니다.

제 아내가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해서 그 책을 보니까 말만 기독교 교육학이지 기본 원리는 일반교육학과 똑같았습니다. 일반교육학의 원리는 교육의 환경과 조건을 잘 사용하고 조성하면 얼마든지 인간이 좋아진다는 낙관적인 인간이해에 기초하여 발전된 학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원리를 똑같이 하면서 기독교라는 이름만 붙이면 기독교 교육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전혀 다른 교육의 원리와 방법과 내용을 기독교 지성인들이 구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이 사상, 저 사상을 썩어놓는데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가 말씀의 기초위에 지어져 가는 건축물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해서 함께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인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20-22절). 사도가 설명하는 성전이라는 건축물은 요즘같이 콘크리트로 한꺼번에 골조를 치는 그런 건물이 아닙니다.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해서 벽돌을 쌓고 그 벽돌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벽이 되고 그 벽이 연결되고 쌓여져서 조금씩 지어져가는 건물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렇게 그리스도라는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교인들마다 하나의 벽돌이 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라는 건축물로 지어져가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지어져 간다는 말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드러나는 인격과 성품으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로 자라가며 만들어져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교회를 세워 그 안에 남겨놓으신 이유이며 목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용서가, 하나님의 거룩함이 묻어져 나오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기꺼이 자신의 욕심을 무릎 꿇리는 충성된 자세가 나오는 사람을 만들어내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이것을 만들기 위해 교회를 가족으로 묶어서 함께 성전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솔로가 아닙니다. 듀엣도 아니고 트리오도 아니고 하모니로 오랜 세월을 함께 말씀으로 자라가고 만들어져 가는 인격이며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해서 누구는 벽으로, 누구는 천정으로, 누구는 바닥으로, 누구는 화장실로, 누구는 응접실로, 누구는 안방으로, 함께 한 건물로 지어져 가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공동체의 신앙입니다.

이 건물은 혼자 짓는 것이 아니기에 모두 함께 진리를 밝혀 지어가야 할 건물입니다. 나 혼자 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벽은 천정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함께 완성되어가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멸시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이 건물은 지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함께 지어가야 합니다. 나 혼자 뛰어가서 일등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 게으르고 뒤쳐져 있다면 나 때문에 건물 전체가 완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할 것은 아직 우리가 완공되지 않는 공사 중인 건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공사 중인 건물을 보고 실망해서 이건 교회가 아니다 라고 교회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있고 아직 공사 중인 현장이 교회입니다. 그 속에서 가족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으로서 잘 다듬어지고 만들어지고 세워지고 자라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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