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김에스더 목사. The Second Life Foundation, 뉴욕퀸즈교회 담임, 본헤럴드 미국지사장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을 통해 속 사람이 강건해져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초로 굳건히 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 18절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능히 알 수 있도록 간구했습니다. 

여기에서 "안다"라는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는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속 사람이 강건해진 사람은 머리와 지식으로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삶을 통해 만났고 체험했기 때문에 믿음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알고있는 사람은 결코 희생적인 사랑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각방을 쓰며 서로 다른 주머니를 차며 부부가 해야할 기본적인 도리만 하는 이들은 속 사람이 나약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은 결코 상대방을 위해 희생의 수고를 하지 못합니다. 

자기 기분과 감정과 환경에 따라 "바람으로 인해 요동하는 배와 바다 물결"처럼 기분이 좋을 때, 환경이 자기 마음에 들 때, 감정적으로 감동이나 충동이 올 때에는 희생하는 것 같다가도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에 서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성경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A double minded man is unstable in all his ways)"라고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5-10).

믿음이 있는 자는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덕이 갖추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인덕이 갖추어지지 않은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즉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충성(믿음)과 인내와 절제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못하는 이들은 인격을 갖고계신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연장자라고 해서 자기보다 연소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의 많은 폐단 중의 하나가 기득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으나, 교회 안에서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된 자들을 구박하고 마구 대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연소한 이들이 자기보다 성경을 더 많이 묵상하고 연구하며 주님과의 교제가 더 깊고 성령충만할 때, 그를 격려해주며 도전을 받아서 그 동안 게을렀던 신앙생활을 회개하며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수많은 기득권자들이 자기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참된 주의 종들을 예수님과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였던 것처럼 그렇게 핍박하고 거짓말을 지어내어 참소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믿음이 없으므로 덕을 갖출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덕을 갖추려면 먼저 믿음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어서 인덕을 갖추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이는 인덕이 없고, 인덕이 없는 이는 그리스도를 알고싶어하지 않습니다. 물질과 명예만 좇아다니며 그리스도를 알기위해서는 조금도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와 건강 등 자신의 것을 바치거나 부인하지 못합니다.

비록 지식이 있을지라도 알고있는 지식에 대한 절제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가 해야할 자리에 자기가 서있으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무리 목회자보다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고, 풍부한 체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와 목회자를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교회와 목회자를 컨드롤하려고 한다면 그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반대로 목회자가 평신도의 자리에 서서 일일이 간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과 간섭하는 것은 다르면서도 비슷한 양상을 띱니다. 따라서 항상 더 많이 알고있고 경험했다고 하는 이들은 항상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식을 갖춘 다음에는 다른 이들이 나보다 모르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이 깨달아 알 때까지 온유한 심정을 갖고 참아줄 수 있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건의 훈련은 인내를 통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훈련을 통해 인내를 배운 사람은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믿음이 있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만, 지식만 갖춘 사람은 이웃 사랑하는 것이 매우 힘이 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1장22-25절에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속 사역을 말합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을 언급하며 그것을 감사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완전히 알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한된 시공간에 살고있는 피조물인 우리가 진정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그 크고 넓고 깊고 높은 사랑을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몸에 모두 전가시켜서 돌아가신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인간은 결코 깨달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것을 알 수있는 길은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에 가능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는 교인들이 복을 받고 잘 살기를 기도하기 이전에,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아 알기를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2)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온전히 이루지도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고있다고 토로합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어떠한 일에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는 우리 크리스천이 끊임없이 성화되어가면서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여러 종류의 상처치유집회를 통해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회개가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상처를 품고있다는 것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상처를 갖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랑할 수가 없으십니다. 따라서 그의 삶은 고달프고 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미움과 용서하지 못함과 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 및 자격지심 등을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느냐?" "예수님도 아닌 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 거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다고 모든 권세를 위임해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입술로는 잘 외우면서, 왜 우리의 입에서는 "내가 예수님입니까?" 또는 "당신이 예수님이냐?"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까? 이렇게 말과 행실이 다른 믿음이 없는 말은 우리의 입밖에 내지 맙시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또는 예수님으로 즉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부인이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완전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내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며 그분이 나를 통해 드러나시기 위해서 철저히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절대적인 희생과 헌신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1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함께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내 머리가 잘리고 예수께서 머리가 되셔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충만함은 종말론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이러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서 마지막날에는 천국에서 완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 영화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기도를 잊지말고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찬송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빌 2:5-8).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충만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3-15)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오늘 나의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그 풍성하시고 놀라우신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저희를 위해 쉬지않고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높고 깊고 넓으신 사랑을 피조물인 제가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제한된 머리로 감히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주님의 그 사랑을 만분의 일, 아니 백만분의 일 만큼만이라도 알고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또한 성경을 통해 저에게 하나님과 그 놀라우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희생과 헌신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의 온전한 신앙생활과 성화된 삶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일처럼 간구하고 계시는 목사님과 가족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그들을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 거할 수 있도록 이제부터 열심히 기도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여 주옵소서.

지식으로만 알고 머리만 커져서 항상 모든 환경과 모든 사람을 지배하여 컨트롤하려고 했던 것들을 생각나게 하셔서 그 모든 허물을 주님앞에 다 내려놓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저의 열등감과 자격지심 등을 유발시킨 상처를 주님 앞에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상처를 주고, 기분나쁘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므로 제 얼굴은 자주 어둡고 주님의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저 한 사람 때문에 주위가 자주 탈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환경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며 살아왔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이 저에게 희생의 사랑을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위해 무릎을 꿇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더러운 발을 닦아주려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제 무릎은 너무나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어서 좀처럼 굽혀지지 않았고, 제 마음은 더욱 그럴 마음이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해야할 것은 보지 않고, 남이 저에게 해야 할 것을 보며 그것을 못했을 때에는 지적하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차근차근히 설명해주시며 끊임없이 몸으로 섬기는 헌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로 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몸소 본을 보이는 것에는 많이 게을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몰라서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말로 하는 것도 온유한 심정으로 부드럽게 권면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제 감정에 충실하여 화를 내기도 하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저의 모든 육체의 정욕을 못박고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제가 주님안에 거하고, 주께서 제 안에 거하시기를 원합니다.

바라옵기는, 제 의지가 너무나 연약하오니 저를 강권적으로 붙잡아 주셔서 제가 말씀을 읽고 머리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며 인내할 수 있게 하시며, 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저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움직여 주옵소서. 저도 용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대하겠습니까? 이러한 것들도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제 육신이 너무 약해서 실천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하오니 주여, 제가 그리스도의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저를 강권적으로 붙잡아 주옵소서.

그래서 오늘도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 거함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기를 소원합니다. 저를 통하여 오늘도 영광을 받아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