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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왜 ‘세습’이란 오명을 쓰고 있는가?
  • 고경태
  • 승인 2017.11.1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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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명성교회, 십만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에서 세습을 한다고 모든 언론매체들이 보도할 정도로 논란이 되고 있다.

JTBC 앵커는 브리핑에서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라고 리처드 핼버슨 목사의 발언을 발췌해서 보도했다. 포항 지진 사태에도 세습에 관한 언론의 관심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러한 풍토에서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약칭 세바연, http://www.seban.kr)이란 사회단체까지 형성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세바연은 교회세습 상황을 세밀하게 수집해서 소개하고 있다. 교파를 초월한 전국 교회에서 소형에서 대형까지 세습 상황을 확보하고 있다. 세바연은 세습을 교회나 기독교 유관기관을 혈연으로 대물림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부자세습ㆍ사위세습교차세습지교회세습징검다리세습 등 다양한 세습형태까지 소개하고 있다. 세바연은 대형교회 뿐만 아니라 미자립교회 세습까지 반대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세습(世襲)’은 왕국(王國)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핼버슨 목사의 발언에 첨가하면, “교회는 한국에서 와서 왕국이 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장로교 정치 원리에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지만, 소수의 강력한 반대가 있으면 그 결의를 연기하도록 했다(합동 총회 헌법 15장 목사 선교사 선거 및 임직, 3조). 장로교는 의결에서 민주주의 방식인 다수결원칙과 성도의 양심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이다(장로교 정치원리 1조). 장로교 정치 원리에 의거한다면 절대로 절대왕정이나 민주정치 형태가 장로교회에서 발현될 수 없다.

따라서 장로교회에서 세습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자체가 장로교임을 부정하는 자기모순이다. 한국의 장로교 교단 가눙데 예장통합 교단은 세습방지법을 의결한 상태이고, 예장합동과 예장고신은 세습방지법을 의결하지 않고 있다. 그런 예장통합 교단에서 변칙적으로 세습이 이루어진 것은 아쉬운 점이 많다. 장로교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세습방지법까지 의결한 심각한 상황에서 세습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타 교단들은 세습방지법을 결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습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꿩이 머리를 풀 속에 쳐 넣고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스운 것이다.

이처럼 작금의 한국교회는 목회세습이 교회세습이 되는 형국이다. 세바연은 그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미자립교회까지 세습을 반대하는 운동을 적용했다. 교회가 양심과 자유가 넘치는 공동체라면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가 의식이 통제되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양심 발언을 쉽게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소수자가 심각하게 반대하면 기다리고 설득하면서 진행할 수 있다. 한 성도의 양심은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의 양심이다. 성도도 자기 양심을 스스로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어야 한다. 내부비리를 고발하자는 것도 아니고, 자기양심을 양심껏 표현하자는 것이다. 그런 교회에 목사는 성도들의 자기 표현을 잘 이해하고 수용해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무엇이 문제가 될까? 거꾸로 되는 상황을 그릴 수 있다. 성도는 목사의 아들을 교회에 세우려고 하고, 목사와 목사의 아들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기쁨으로 허락할 수 있고, 눈물을 흘리며 거부할 수도 있다.

세습을 반대하는 운동을 함에 있어서 "반대"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우려가 있다. 성도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세습이 이루어지지 않을 풍토는 대형교회에 권력집중적인 풍토를 제거하는 것이다. 교회 일원은 교회 결정에 일정부분 책임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결정에 적극적인 참여와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 권력은 재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재정운용 상황을 교회 성도가 직접 파악해야 한다. 성도가 예배에서 은혜만 받으면 끝이 아니다. ‘청구권’을 행사해서라고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국가는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고(헌법 26조), 교회는 문서가 아닌 장로를 통해서 담화로 청구할 수 있다. 성도들이 장로교 정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습득해서 헌법 원리에 의해서 교회가 운용될 수 있도록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미비한 헌법 원리도 스스로 청원해서 바르고 합당하게 수정할 수 있다.

 

교회, 만유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

교회의 목사는 그 주의 양들이 모인 곳이다.

양을 목양하는 목자는 반드시 양의문으로 들어온다.

울타리로 들어온 목자는 거짓목자이고 늑대이다.

 

교회, 그 아름다움은 거룩과 조화이다.

거룩한 신부는 흠도 없고 티가 없다.

신부화장으로 감추는 것이 아니라

산노루처럼 뛰놀아 검은 얼굴이지만 흠이 없고 티가 없다.

조화로운 신부는 소리가 크지만 웅장하고

숫자 많지만 겸손하고 온유하다.

숫자 적지만 천천이고 만만이다.

 

그 교회의 자태를 가진 자 누구인가?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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