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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7) 성령 하나님
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1. “성령을 믿사오며”는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은 믿음의 대상을 지시한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한 하나님 밖에 없다. “성령을 믿는다”고 하면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한 실체를 이루어, 한 믿음이다. 성부, 성자, 성령에 세 믿음이 아니라 한 실체에 한 믿음이다. 그러나 세 위격으로 구분되었듯이, 믿음도 각각 위격으로 구분된다. 한 믿음의 대상이지만, 구분된 세 위격의 믿음에서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으로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에서 시작하고 있다. “나는 주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은 것은 성경에서 용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구분(區分)과 구별(區別)은 어떤 ‘구(區)’에서 정해진 것을 아는 것은 구분이고, 계속 정해가는 것은 구별이라고 한다. 분별(分別)은 구분하고 구별하는 것으로 대상 지식을 식별하고 관계(내용) 지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대상 지식은 삼위일체로 절대 불변하고, 관계 지식은 사유의 정도에 따라서 분류(分類)해야 한다.) 

2.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문장이지만, 보이지 않게 가장 광범위하게 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수면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창조를 조성하시는 ‘창조주의 영’이시다. 그래서 성령도 창조에 계신다. 그리고 성자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으셨다. 구원을 적용하실 ‘구속주의 영’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에게 임하셨다(행 2장). 그리고 성령은 복음전도자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그리스도인을 이루신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성령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도록 되어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립하고 전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역할이 성령이 하신다.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음과 동의어이고, 성령이 충만한 곳에 예수 이름이 충만하다. 우리에게 믿음과 행위 관계가 대두되는데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데 예수 이름이 소홀하거나 없다면 거짓으로 평가해야 한다. 분별은 안전하게 분별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3. 고대 교회에서부터 성령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있었다.

성경은 예수를 믿도록 인도하고 훈련하는 학교이다. 성경에서 거짓 가르침은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형태이고,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적그리스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경이 완료된 이후, 고대 교회에서는 성령에 대한 그릇된 이해들이 발생했다. 교회 안에서 그릇된 주장이 나오는 목표는 단 하나, 예수 이름이 줄어들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찌되었든지 주의 이름이 나타나도록 힘써야 한다(빌 1:18).

고대 교회에서 잘못된 성령 이해는 첫째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이다.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은 현재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성령과 천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현상은 있다. 여전히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흔적이 있는 것이다. 둘째 성령이 성경을 무시하고 기록 문서 밖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를 영감해서 성경을 기록하도록 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계시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먼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계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런 것을 상상할 필요가 없다. 성령이 성경 저자를 감동해서 계시를 주듯이 지금도 계시를 준다는 것은 완성된 구속 사역과 충만한 계시에 대한 모독이다. 성령이 하지 않은 일을 한다고 주장하니 무고죄(誣告罪)로 ‘성령모독’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로 강림하셨고, 그 구속의 성취를 성도들에게 내주해서 명료하게 조명한다. 성령이 하실 수 있지 않겠느냐?고 추측하거나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며 겸손도 아니며, 교만이고 불신이다. 고대 교회에서 성령 운동을 주창한 대표적인 세력은 몬타누스였다(Montanism). 몬타누스의 독단은 교회가 정경 목록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촉구시켰다.

또 20세기에 성령 운동을 주창한 대표적인 세력은 아주사 부흥운동(Azusa Revival, 1906년)인데,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건이다. 방언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방언으로 그리고 신사도 운동으로 확장된 것이다. 아주사 부흥운동은 성결운동(The Holiness Movement)으로 시작해서 방언으로 나갔고, 사도적 신앙 운동(Apostolic Faith Movement)을 주장했다. 이 운동은 1996년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가 '신사도 개혁'(New Apostolic Reformation)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사도 운동으로 정착했다. 세계교회, 한국교회는 강력한 성령 운동을 막지 못할뿐더러 통제하지도 못하고 있다. 신사도 운동은 능력전도(power Evangelism)으로 사도 회복 운동(Apostles Restoration Movement)으로 변환되었다.

성령은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하는 목사로 말미암아 교회를 세우고 유지한다. 성도는 복음을 들으며 성경을 읽으며 믿음을 증진하며 성령 충만을 받는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보면 성령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바람에 순응하며 가는 사람과 성령의 바람에 역행하며 가는 사람이다. 세상 풍조에 역행하는 사람과 세상 풍조에 순응하는 사람이 있다. 성령을 역행하며 세상 풍조를 따르면서, 성령을 따르며 세상 풍조에 역행한다는 착각이 가장 어리석은 영적 상태이다. 

4. 성령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은혜와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지 말고, ‘신비주의’라고 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신비주의를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서민적 신비주의(방언 / 큰소리로 기도없음)와 귀족적 신비주의(관상기도 / 침묵으로 기도없음)로 분류한다. 신비주의는 많은 시간 기도하고 영적 운동을 하지만, 결코 기도하지 않고, 믿음의 대상으로 가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자기 내면 깊음으로 정진하며, 그것을 하나님께로 간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을 힘쓰며(Coram Deo), 하나님 앞으로 갈수록 하나님의 존엄에 압도되며 두려움과 사랑(경건)이 가득하게 된다. 두려움과 사랑이 가득한 상태가 확신(確信)이고 희락(喜樂)이다.

신비주의에서 경험하는 즐거움은 두려움이 없는 쾌락(快樂, 放縱, Atarxia)이다. 또 신비주의는 모든 경험과 감정을 부정하는 무정념(無情念, Apatheia)을 추구하기도 한다. 신비주의는 목적지에 도달할 방법(예 The Philokalia, The Ladder of Divine Ascent, 방언 교육)을 구체적으로 배열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비주의에서는 단계, 단계가 등장한다. 신비주의는 이성적이고 철학이고 종교가 될 수 없다. 종교(宗敎)를 넘어선다고 외치지만 철학(哲學)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종교인이 아니라고 자부하기도 하지만, 철학 수준에서 힘쓰고 있는 것이다.

5.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매우 단순한 문장처럼, 매우 명료하게 고백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 이름이 풍성하면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성경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명료하게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를 시행하는 교회는 삼위일체를 부정할 수 없다. 성경을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하는 아들과 성령은 두 믿음 체계나 세 믿음 체계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한 믿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하나님”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다. 필자는 성령 믿음을 고백하면서, 성령을 구하지 말고, 예수 이름을 사모하면 성령이 충만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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