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생존본능이란 자기보존의 본능, 살아남으려는 본능, 주로 고통과 같은 부정적인 피드백에 의해 스스로를 위험한 것들로부터 보호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생명체가 살려고 하는 본능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화론에서도 생명체의 살려고 하는 본능에 대해서는 전제하는 것이지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동물과 식물은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어서 생존이 가능합니다. 살려고 하는 본능이 바로 생명력입니다.

만약에 어떤 생명체에게 이런 본능이 없다면 오래 생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식물의 잎이 햇빛을 따라 방향을 잡는 것도 살려고 하는 본능 때문이고 식물의 뿌리가 수분과 영양분이 있는 곳으로 뻗어가는 것도 살려고 하는 본능 때문입니다. 다윈은 식물 뿌리의 끝이 동물의 뇌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식물의 뿌리 끝, 즉 근단(根端)이 뿌리는 물론 식물의 생장을 지휘한다고 합니다. 매우 인상적인 이론 이기는 하지만 이 이론이 식물을 제대로 이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식물 줄기나 잎 부분의 필요와 뿌리의 필요가 다르고, 심지어 물, 영양소, 무기염류 등이 각각 다른 곳에 분포해서 뿌리가 뻗어나가야 할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단이 마치 인간의 뇌처럼 몸의 여러 부분의 서로 다른 욕구와 문제를 종합하여 식물 전체를 위한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식물에 대한 의인화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물 한 포기가 시시각각 중력, 기온, 습도, 전기장, 빛, 압력, 독성물질, 소리의 진동,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농도 같은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 처리하여 뿌리가 뻗을 방향을 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식물은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식물의 생존 본능에 의한 생명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설명한 것일 뿐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식물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해도 살려고 하는 본능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야생 동물들도 건기가 계속되면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이동 합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본능에 의해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가뭄이 오래 지속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존 하려는 본능적 활동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생명체의 모든 활동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존본능이 바로 생존의 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살려고 하는 모든 노력이 생존의 방식입니다. 기분이 좋은 것도, 기분이 나쁜 것도, 화를 내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것도,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것도,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모두 생존의 방식입니다.

식물을 비롯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에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까지 이 생존 본능에 순응하여 생존을 유지해 갑니다. 생존 본능에 순응하지 않는 생명체는 생명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생존의 본능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도 생존 본능에 의한 생존의 방식을 취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이 생존의 본능을 거스르면 죽습니다. 배가 고픈데도 음식을 안 먹는다거나 목이 말라도 물을 안 마시면 죽습니다. 고통을 느끼는데도 그 원인을 제거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생존의 본능 때문에 생존이 가능합니다. 배가 고파도 밥 먹기 싫어하는 병이나, 몸이 병 들었거나 다쳤는데도 고통을 못 느끼는 병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영적 생명을 약속합니다. 그 영적 생명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영원히 사는 것인데, 영원히 사는 구원을 우리는 시간적 개념으로만 생각하여 죽지 않고 계속 사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 생명은 시간적 개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차원의 생명 완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차원을 성경이 설명하지만 너무 심오하고 신비로워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영적 생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더욱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영적 생명의 생존 방식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 부활하여 누리게 될 영적 생명과 이 땅에서의 영적 생명은 존재 방식이 다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는 것은 이 땅에서의 영적 생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설명에 의하면 영적 생명은 생물학적 생존 본능을 따름으로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본능을 거슬러 행동해야 생존이 가능합니다(cf. 마 16:24, 요 12:25). 성경은 영적 생명에 대한 교훈에서 생물학적 생존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성경은 죽기 위해 몸부림치라고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영적 생명의 길이 좁은 길이라고 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의 말씀이고, 우리의 신앙생활 즉 영적 삶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본능을 따라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따로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본능을 따를 때도 좀 세련되고 품위 있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교육도 필요하지만 생존 자체를 위해서는 그런 것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려고 하면 본능을 대체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본능은 그 자체가 행동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감정입니다. 먹고 싶어 하고, 하고 싶어 하고,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행동의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영적 생명은 그 본능을 거부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본능을 거슬러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본능처럼 자체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본능을 거슬러 하는 행동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본능은 본능의 욕구를 따라하면 되지만 그 본능을 거부하고 나면 그 다음은 의지적으로 결정을 하고 의지적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의지는 감정이라는 후원군 없이 외로이 혼자 싸워야 합니다. 성경이 영적 삶을 전투하는 군인에 비유한 것도 감정보다는 의지적으로 행동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성경이 가르치는 최고의 법인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감정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감정이 의지에 의해 통제되고 조종될 때 비로소 인간이 짐승과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의 지위에 합당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 생명의 존재 방식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죽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죽는 것은 모든 생물의 생존본능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하여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것은 스스로 깨달아서 취한 경건의 삶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따른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 것은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고 본능을 거스르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심리적이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본능적 욕망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십자가’이고 ‘죽는다’입니다. 본능적 욕구를 거부하여 죽는 길을 선택하는 영적 생명은 부활로서 완성될 생명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만이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는 무엇을 선택 하는지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헌신적이고 진정성이 있는 말을 하라도 그가 재물과 명성과 인기와 권력과 지위를 얻는 일에 집착하여 행동하고 선택한다면 영적으로 죽은 자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서도 거의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처럼 처신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자를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합니다.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것처럼 나타내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순한 양으로 착각하고 위대한 지도자로 오해를 하게 됩니다. 차라리 드러내 놓고 ‘먹고 마시자!’고 하는 사람은 덜 위험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에피큐리안 철학을 따르는 자들이 노골적으로 죽으면 그만이니 먹고 마시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이 현대인을 지배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인생이 별것이냐.’라고 하며,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갖고 싶은 것 갖고, 즐기며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태도와 자세는 영적 생명의 존재 방식이 아니라 생물학적 생존 본능을 따르는 삶의 태도이고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물론 영적 생명이란 무조건 인간의 생존 본능을 다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싶은 욕망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욕구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때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구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너무 많아 바울은 거의 매일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죽어야 하는 현장을 세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보다 더 절실하게 우리가 죽어야 하는 곳은 교회이고, 교회보다 더 많이 죽어야 하는 곳은 가정이며, 가장 심각하고 치열하고 절실하게 죽어야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롬 7:22,23; 고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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