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론 논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해법 제시

송명덕 목사는 총신대학교 및 동 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탄에서 목회중이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송명덕 목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에 ‘칭의론 논쟁’이 핫 이슈이다. 이른바 새 관점 칭의론이라 불리는 톰 라이트를 비롯해서 제임스 던과 김세윤 박사 등의 신자의 ‘구원탈락’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런 새 관점 칭의론의 주장에 대해서 칭의의 불변성을 믿는 전통적 칭의론에 있는 박영돈 교수, 최덕성 교수, 최갑종 교수 등은 ‘거짓신자’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이와 같이 평행선을 달리는 칭의론 논쟁에 대하여 필자는 두 자수 숫자에 해당하는 햇수를 연구하여 ‘구원탈락인가? 거짓신자인가?’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제목도 ‘칭의론 논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해법 제시’라는 부제가 있는 것처럼 칭의론 논쟁은 칭의론 문제뿐만 아니라 신학의 중요한 부분이 내재되어 있다.

사건을 수사할 때 ‘현장조사’가 중요하듯이, 칭의론 논쟁의 기초는 논쟁점이 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필자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논쟁이 되는 본문을 ‘너무 안이하게’ 대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본문을 다루지도 않고 결론 부분인 ‘구원탈락’과 ‘거짓 신자’라는 결론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저서의 제2장의 내용인 마태복음 7:21-13절을 다루면서 시작한다.

1. ‘주여 주여’라고 부른 사람과 천국과의 상관관계
 
양대 칭의론이 첨예하게 맞서는 본문 구절을 다루면서 과연 ‘구원=천국’이고 ‘천국=구원’인지 아닌지, 양대 칭의론의 주장과 함께 필자의 관점을 제시하겠다. 논쟁의 중심이 되는 성경말씀을 보자.

¶ “21 나더러 주여 주여(Lord, Lord) 하는 자마다 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but)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the will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Lord, Lord)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in your name) 선지자 노릇 하며(prophesy) 주의 이름으로(in your name) 귀신을(devils)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in your name) 많은 권능을(many miracles)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I never knew you)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you that work iniquity) 내게서 떠나가라(depart from me) 하리라”(마7:21-23)

먼저 다루어야 할 주제는 양대 진영이 서로 논쟁을 벌이는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천국과 구원의 동일시’이다. 그러므로 “구원과 천국은 동일한 것인가?”라는 주제는 양대 논쟁의 ‘프레임’을 다루는 문제이기에 중요하다.

(1) ‘주여 주여’라고 부른 자들에 대한 양대 칭의론의 주장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들을 ‘새 관점 칭의론’은 ‘구원탈락’으로, ‘전통적 칭의론’은 ‘거짓된 신자’로 간주한다. 그런 근거는 주님이 그들에게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아마 대다수의 독자들은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이런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못해 ‘변론할 적절한 말이 없이 궁할 때 쓰는 도피’라 생각된다. 흔히 천국에 대한 말씀을 대하면서 선하고 칭찬받는 사람은 모두 신자이고, 잘못되고 책망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불신자라고 간주한다. 이런 논리는 상식적이거나 논리적이지도 않다. 혹시 확실치 않은 것이 있다면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고 인내심을 갖고 성경에서 하나하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자세가 참된 학자의 자세이다.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양대 칭의론의 논쟁점이 되는 위의 말씀은 ‘전체부정’인가 ‘부분부정’인가? 이 구문은 평이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뜻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오정과 저팔계가 영어마을을 방문했다. 다음 문장을 맞추면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상품으로 준다는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지나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우리 모두 대학입시 때는 영어가 ‘징글징글’했지만 한 때 우리도 웃으면서 영어를 배웠을 소시적을 추억하면서 다음 문장을 보자.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어려운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간파한 저팔계가 사오정에게 아이스크림을  뺏길세라 급한 마음으로 손을 번쩍들었다.
“빛나는 모든 것은 다 금이 아니다.”
저팔계의 해석대로 한다면 ‘금에 대한 정의’에 어떤 결과가 되는가? 금을 제외하고 반짝이는 다른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팔계의 해석을 따르면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금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녹슬지도 않고 반짝이기 때문이다. 저팔계가 그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고집하려면 적어도 한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금이 ‘반짝이지 않도록’ ‘긴급조치 1호’를 취해야 한다. 그런 일은 우리가 알다시피 ‘미션 임파서블’이다. 부주의했던 저팔계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기회를 놓쳤다. 이미 잘못된 답을 한 저팔계 덕에 사오정이 감을 잡아 해석했다.
“빛난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저팔계의 해석과 사오정의 해석은 차이가 있다. 저팔계는 ‘반짝이는 것은 다 금이 아니다’라면서, 금이 ‘반짝이는 것’까지 부정했다. 그 결과 ‘금이 반짝이기 때문에 금이 아니다’라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사오정은 금이 ‘빛나는 성질’을 그대로 두면서, 다른 물질이 빛난다고 금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았다. 사오정과 저팔계의 두 문장의 차이는 한 마디로 무엇인가? 전자는 ‘전체부정’이고 후자는 ‘부분부정’(partial negation)이다. 두 해석을 비교해 보자.
☞저팔계- “빛나는 모든 것은 다 금이 아니다.”(전체부정)(X)
☞사오정- “빛난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부분부정)(O)

①  만일 ‘전체부정’이라면 ‘♨’
만일 ‘대단한 일을 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전체부정’의 말씀이라고 가정해보자. 어떤 의미가 되는가? “나를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자는 모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만일 독자 가운데 ‘전체부정’으로 생각했다면 학교를 졸업한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든지, ‘가물치’ 매운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가물가물’하든지, 오징어 먹물염색약이 머리까지 침투해 잠시 CPU까지 ‘먹통’이 되어서 이해할 길이 없다.

만일 이런 의미라면 누가 천국(=구원, 전통적인 관념은 천국과 구원을 같은 의미로 간주하기 때문)에 갈 수 있겠는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없으니, 그 반대로 예수를 ‘주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 즉 ‘불신자’들이 천국(구원)에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얼마나 해괴하고 엉터리 같은 말씀이 되는가? 성경의 의미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위 말씀을 ‘전통적인 관념’을 전제로 ‘전체부정’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튀어야’ 사는 독자들도 이번만큼은 잠잠하리라 믿는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언한다. 예수 외에는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은 없다. 이 선언은 수정된 적이 없다. 양대 칭의론의 ‘구원=천국’이라는 관념은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구원의 탈락’으로 이해한다.

주님의 말씀을 ‘전체부정’으로 본다면, 이들이 ‘구원=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주여!’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말인가? 독자들이 모두 알다시피 위의 말씀은 ‘전체부정’이 아니다.

만일 독자들 가운데 가슴을 졸이며 ‘깜짝 놀란’ 나머지 이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휴∼’라는 한숨이 나왔다면, 필자가 조언하는 것을 허락하길 바란다. “당신의 입이 ‘휴∼’(休)라고 고백했듯이 ‘복잡한 도시를 떠나 깊은 산속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나무 아래에서’(under tree)  ‘서있노라면’(stand) ‘언더스탠드’(understand)가 올지도 모른다.” 센스 있는 독자는 ‘전체부정’ 뒤에 ‘♨’를 ‘뜬금없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는 가까운 곳에서 휴식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만일 저팔계와 같이 전체부정으로 본다면 ‘♨’이나 ‘under tree’나 ‘‘under wood’에서 몸과 마음을 푸는 휴식이 필요하다.

②  만일 ‘부분부정’이라면 ‘♬’
 혹시 센스가 ‘형광등’인 독자만이 ‘부분부정이라면’이라는 제목 뒤에 있는 ‘♬’를 첨가한 이유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만나?’(manna)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형광등도 ‘조금 기다리면’ 켜질 것이니 낙심할 필요가 없다. 칭의론 논쟁의 이슈가 되는 말씀을 ‘부분부정’으로 보면 ‘독자’와 ‘필자’와 말씀을 주신 ‘주님’이 즐거워한다는 의미이다. 전체 부정의 반대 개념은 ‘부분 부정’이다. 위 말씀을 ‘부분 부정’으로 풀어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나를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자라고 해서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 가운데 천국에 들어갈 자가 있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다. 왜냐하면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 말씀은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구원의 문제’와 ‘천국의 문제’이다. 양자는 동질성보다 확연한 차별성이 있다.

‘주님을 주여’라고 부른 것은 ‘구원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천국의 문제이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의 문제’이다. 이것은 구원과 천국에 대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구원과 천국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천국의 길’을 간다. 불신자들에게는 천국의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다. “예루살렘이 헬라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은 여기에 해당한다. 

산상수훈은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다.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문제’가 아니다. 주님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신자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일’을 했던 사역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 모두가 ‘주님이라 부르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들이 ‘적어도 신자’라는 것을 입증한다. 다만 그들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주여 라고 불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주님의 말씀은 ‘전체부정’이 아니라 ‘부분부정’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모두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다시 말하면 오늘날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구원=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 갈 기본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은 신자이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신자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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