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8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대부분의 사람은 오래 사귀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저런지 몰랐다. 진작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을 거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라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오래 사귀면 사귈수록 “아니 이런 면도 있었어? 아니?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어?” 긍정적으로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알면 알수록 경이롭고 신비롭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분입니다. 아무리 알려고 해도 그 깊이와 영광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분입니다. 오늘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바로 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한 결과 생긴 것이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 문제들로 산적해있는 지상의 교회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교회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된 비밀의 경륜이 드러난 곳인 동시에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드러나는 놀라운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볼까요?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교회는 뻔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안 되는 것 같은데 되고 되는 것 같은데 안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천편일률적인 조직의 논리와 이 세상 제도의 공식적인 개념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측을 불허하는 놀라운 공동체이며 신비로운 하나님의 비밀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지혜가 담겨 있고 그것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타내고 알게 한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보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이 사람에게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곧 천사들이라고 합니다. 여기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어떤 주석가는 천사들이 아니라 이 땅의 국가와 정치-경제적 구조나 권력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지만 바울서신과 에베소서 본문의 문맥으로 지지받지 못하는 견해입니다. 본문이 하늘에 있는 통치자와 권세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에 천사들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천사들로 볼 때도 어떤 주석가는 선한 천사로(칼빈, 헨드릭슨, 로이드존스, 존 스토트), 어떤 주석가는 악한 천사로(김길성, 베이스, 케빈길레스), 혹은 둘 다를 포함한 모든 천사로(부루스) 해석하는데 저는 세 번째 견해를 지지 하지만 그 정도가 주로 선한천사들이며 악한 천사들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무엇일까요? 벧전1:10-12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원에 관한 것, 복음에 관한 말씀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천사들에게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아래 들어간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공의와 사랑을 다 만족하시면서 구원해 낼 수 있을지는 매우 궁금한 문제입니다. 사랑을 완성하려면 공의가 구부러지고 공의를 드러내려면 사랑이 문제가 생깁니다. 천사들의 지혜로는 도저히 풀길이 없습니다. 해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푸실까? 궁금증을 가지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실까? 천사들이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십니다. 이삭이 태어나고 야곱이 태어나고 요셉이 태어납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갑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이러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와중에 기근이 들고 그의 식구들이 애굽에서 먹고 살게 됩니다. 아! 이렇게 하려고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거기 들어갔던 모든 이스라엘이 거기서 노예가 됩니다. 짧지도 않는 430년 동안을 종살이 합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더니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제는 모세를 통하여 무엇인가 일이 일어나겠지 했는데 그냥 모세가 혈기를 부리고 미디안으로 도망갑니다. 80세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모세를 그냥 두십니다. 천사들이 답답해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는가? 그런데 그때쯤 모세를 다시 부르십니다. 드디어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십니다. ‘과연 하나님이시다’ 그랬더니 애굽에서 벗어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렇게 할 바에야 뭐 하려고 애굽에서 꺼집어내었는지 도무지 천사들이 감을 못 잡습니다.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그들을 가나안에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제는 뭔가 되어 가는가 보다 했는데 사사기에 가면 또 매일 이방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종노릇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번에 다윗을 일으키십니다. 다윗을 일으키시고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스라엘이 통일되고 이제는 정말 멋있게 되겠지 했는데 솔로몬이 죽자말자 또 이스라엘은 둘로 쪼개지고 둘 다 엎치락뒤치락 싸우다가 바벨론과 앗수르에 둘 다 망해버리고 맙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이제는 정말 뭔가 좀 될까 했는데 이번에는 그리이스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하고 그 다음에는 로마의 속국이 되고 맙니다.

천사들이 놀라는 것은 지금까지 누구를 불러서 일을 시켜도 그들이 볼 때 될 것 같다가도 안 되고 이제는 되겠지 했다가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하나님이 누구를 등장시키십니까? 예수님을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다 보내셨습니까? 마구간에 보내십니다. ‘아니 이럴 수가!’ 천사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마구간에..... 그래도 예수님이니까 뭔가 다르시겠지....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 그때 천사들이 놀라서 간이 떨어지지 않았겠는가? 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아래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천사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했을 것입니다. 악한 천사들도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 잡은 자 사단을 멸하시고 무덤에서 승리하사 무덤을 가르시고 나오십니다. 그때 천사들이 과연 하나님의 지혜이다. 감탄을 하면서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렸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 얻은 자 뿐만 아니라 천사들에게도 하나님의 엄청난 지혜인 것입니다.

딤전 3:16절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왜 천사들에게 보이십니까? 천사들이 가장 궁금한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사 짠! 하시고 그들에게 보이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인간의 죄를 처리하시며 해결하시는지, 사랑과 공의를 어떻게 동시에 만족시키시며 조화를 이루셨는가를 십자가를 통해 푸셨기 때문에 지혜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와 신자라는 이름으로 여기 불러 모인 우리들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시하게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빚어 만드신 것보다 더 귀하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뿌린 피로, 그의 거룩한 의로 새로 옷 입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로 여기 모인 우리들입니다.

지금 에베소 교회의 약한 성도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신령한 메시지들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고전 4장 9절입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은 천사들과 사람들이 전혀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사도들을 어디다 두었습니까? 만물의 찌끼 같이 두셨습니다. 천사들이 생각할 때 복음이 저렇게 해서 어떻게 전파되겠는가? 도대체 이렇게 해서 무슨 구원이 만민에게 미칠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 방법을 통해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울을 사용하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한 걸음 걸을 때 마다 한 대씩 맞으면서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배타면 파선하고, 강에 가면 빠지고, 어느 마을이든지 들어가면 먼저 감옥부터 가고 그런데 그런 방법으로 죄인들이 돌아오더라 말이죠.

그래서 눅15:10절에 보면 죄인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왜입니까? 도무지 되지 않을 것 같은 방법으로 죄인들이 하나씩 돌아오니까 그때마다 천사들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때마다 방법이 달라요. 똑 같이 기계적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각종 지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 죄를 속하시는 방법도 참으로 놀라운 지혜인데 그 구원을 우리 개개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더 놀라운 것입니다. 한 사람도 같은 방법으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다양한 방법을 보십시오. 하나도 기계적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다 다르게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만 내가 구원받은 통로를 이야기해도 밤을 새워 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삼손같이 갖고 나온 사람이 있겠죠. 누구는 바울처럼 드라마틱하게 회심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 다릅니다. 다 하나님의 지혜로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니 각종 지혜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지혜의 부요하심입니다.

오늘 신자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못하고 조금만 우리에게 힘든 일이 닥치면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구경하는 지점에 갔을 때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빛날 것인가? 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구경하는 눈초리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이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하셔도 꼭 우리를 높여 주고 드러내주는 방식으로 일하셔야지 구경꺼리가 되는 식으로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우리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편안할 때 신앙이 깊어지고 부흥된 역사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이 위태로워 보이고 몰락해 보이기도 했습니까? 로마의 10대 박해가 왔을 때 이제 기독교는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그 박해를 통해 더 생명력 있고 능력 있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우리 삶에 한번 적용시켜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이 가장 많이 고조되었을 때가 평안할 때이던가요? 아니면 눈물과 한숨 속에서이던가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깊은 신뢰로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항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각종 지혜, 그 지혜의 부요하심이 다른 사람을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지극히 작아 보이고 미천해 보이는 우리들을 위하여 동원되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각종 지혜로 부르신 분이 지금도 우리의 삶을 그의 지혜로 간섭하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믿으시고 모든 유혹과 어려움 중에도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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