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이른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전과는 달리 잠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서는 속도가 많이 느려졌습니다. 몸을 일으켜 세울 때 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없는데, 요즘은 손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은 허리와 손과 팔이 몸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힘겹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꼭 허리나 팔목을 다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심리적 느낌만이 아니라 몸을 일으킬 때 실제로 허리나 팔목이 아픕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 새벽에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 두 발로 서서 거실로 걸어 나오는데, 불현 듯 두 발로 서서 걷는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느낌은 인위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지...? 젊었을 때에 비하면 비록 조심스러운 걸음이지만 두 발로 자연스럽게 걸어서 거실을 지나 부엌 쪽 문을 열고 화장실 쪽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늘 하는 여상한 자신의 행동에 이런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처럼 생긴 물건을 만들어 두 다리로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세운다고 해도 여간 불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 개의 다리나 네 개의 다리로 세워야 안전합니다.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의 몸은 나무처럼 딱딱하지도 않아서 두 다리로 바로 선다는 것이 더욱 어려울 텐데, 바로 설 뿐 아니라 몸을 앞뒤좌우로 굽혔다 폈다하면서 유연하게 걷고 움직입니다.

‘걷는 것이 이렇게 쉬운데 인간이 만든 첨단 로봇은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걷지 못할까? 아니, 과학이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했는데도 인간은 자신처럼 자연스럽게 걷고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지 못할까?’ 나는 걷는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걷는다!’, ‘나는 본다!’, ‘나는 말한다!’,‘나는 생각한다!’, 걷고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신기하고 황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어떤 로봇보다도 자연스럽게 걷고, 비록 성능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어떤 카메라 렌즈보다 고성능의 눈으로 보고, 로봇이 흉내 낼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하고,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사색과 사유의 유영을 하고 관조를 합니다.

참 신기하고, 경이롭고,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삶을 비관하여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두 다리와 왼 팔과 오른 손가락 두 개를 잃은 다하라 요네꼬,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도 삶을 비관하던 그녀는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더 가혹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자신에게 아직도 세 개 손가락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발견이 아니라 손가락 세 개의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그녀를 감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세 개의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이‘산다는 것이 황홀하다’입니다. 걷고,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하나하나가 황홀하고 신비롭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썩어 흙이 될 몸이 이런 기능을 한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 그 행동과 기능들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고 감사와 감격의 대상입니다.

시인 홍해리의 <가을 들녘에 서서>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다하라 요네꼬는 실제로 많은 것을 잃은 후에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홍해리는 인간이 은혜를 깨닫는 이치를 노래하였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편작이라는 유명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두 형들도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하는 명의였습니다. 소문을 들은 왕이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 왕궁으로 불렸습니다. ​

“자네가 편작인가?”

“예, 임금님 그렇습니다.”

“자네는 죽은 자도 살린다면서?”

“아닙니다. 사실 저의 의술은 저의 형님들의 의술에 비하면 변변치 못합니다.” ​

임금은 의아하다는 듯이

“아니, 내가 듣기에는 자네가 제일 훌륭하다던데 어떻게 된 것인가? 그럼 자네 형제들 중에서 자네가 보기에는 어느 형제가 제일 유명한 의사인가?”

“사람들은 제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믿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이야기를 해보게”

“큰 형님은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얼굴만 보고도 그 사람이 앞으로 무슨 병에 걸릴지 다 알아서 발병하기 전에 미리 다 고쳐줍니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고 아프기 전에 고쳐 버리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형님의 고마움을 모르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님은 별로 유명하지 않습니다.”

“그랬구먼! 또 다른 형도 의사라고 했지?”

“그런데 저의 둘째 형님은 병이 미미할 때 알아봅니다. 그래서 조금 아플 때 고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 고마워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가?” ​

“사실 저는 형님들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병이 아주 깊어진 다음에야 병원을 찾아오기 때문에 수술도 하고 독한 약을 처방하여 힘들게 치료하여 고쳐줍니다. 그랬더니 미련한 사람들이 자기 몸이 다 망가진 후에서야 고친 것을 가지고 제가 최고인 줄 아는데, 훌륭한 의사는 병이 깊어지기 전에 치료하는 것이고 그보다 훌륭한 의사는 병이 들기 전에 예방하는 의술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편작이 말하는 그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큰일을 치르고 나서야 감사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기적을 바라는 신앙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 불행한 것입니다. 기적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 감사할 일이고 행복한 것입니다. 기적이 아니면 안 되는 인생은 불안과 걱정이 많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적 없이도 잘 살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도 하나님께서 기적이 필요하기 전에 문제를 미리 다 해결해 주셔서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세월 동안 날마다 일마다 나의 삶의 구석구석에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였지만 크고 작은 은총의 손길로 지키시고 돌봐 주셨습니다. 그냥 놔두었으면 큰 병에 걸렸을 텐데 미리 손을 쓰셔서 병에 걸리지 않게 하셨고, 그냥 놔두셨으면 큰 교통사고가 났을 텐데 그것을 막아주셨습니다. ​

내가 미국 올 때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폐에 이상한 흔적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폐병에 걸렸었는데 저절로 나은 흔적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절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미국에 입국할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그 엑스레이 필름을 잘 가지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필름을 얼마 전에 버렸습니다. 우리 자신이 일일이 알지 못할 뿐이지 이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음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크게 일이 잘못되면 그 때서야 천만다행이라고 하면서 감사합니다. 천만다행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 136편은 신분과 소유에 대한 정직한 이해의 토대에서 부른 감사의 노래입니다. 먼저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땅이 없는 민족입니다. 자기 것이 없는 민족입니다. 땅이 없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땅이 없다는 것은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이 없다는 것은 집이 없다는 뜻입니다. 땅이 없다는 것은 재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땅이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이 없으면 주권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은 땅에서 나옵니다. 음식, 옷, 신발, 안경, 휴대폰, 자동차, 먹고 마시는 것 어느 하나 땅에서 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공기도 땅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을 주셨다는 사실, 이 한 가지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고 합니다. 기업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것입니다. 자식은 능력 유무에 상관없이 기업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들의 본래 신분은 종이었습니다.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기업을 받은 것입니다. 신분이 천한 종이지만 기념해주시고 기억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대적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가족이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질병, 예측을 할 수 없는 재난과 사고, 배신과 모함, 시기와 저주로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인간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모든 동식물들을 하나님께서 먹이시지 않으시면 인간도 먹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과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은 땅에서 나옵니다. 그 땅을 인간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주신 그 땅의 실제 소유주는 하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기업에 대한 안전보장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아무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천한 신분의 우리가 하늘의 하나님의 자녀대우를 받고 있으며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식하게 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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