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바르트는 성경을 Saga로 규정한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의 한 부분을 인용했다. 

I am using saga in the sense of an intuitive and poetic picture of a pre-historical reality of history which is enacted once and for all within the confines of time and space. Legend and anecdote are to be regarded as a degenerate form of saga: legend as the depiction in saga form of a concrete individual personality; and anecdote as the sudden illumination in saga form either of a personality of this kind or of a concretely historical situation. If the concept of myth proves inadequate—as is still to be shown—it is obvious that the only concept to describe the biblical history of creation is that of saga(CD., III/1, 81).

나는 역사에 실재했던 전-역사적인 직관적이고 시적 그림의 개념으로 사가(saga)를 사용한다. 이 역사는 시간과 공간에서 한 번 있었던 것이다. 전설과 일화는 사가 형식에서 퇴보한 형태로 간주한다. 전설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특성을 묘사한 사가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일화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혹은 한 종류의 특성의 각 사가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조명한 것이다. 만약 신화 개념이 적합하지 못한다면, 명백하게 창조의 성경적 역사를 묘사하는 유일한 방식은 사가가 될 것이다.

바르트가 saga를 정의했지만, saga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김효성 박사는 ‘무용담(武勇談)’으로 번역했다. 다른 번역으로 ‘전설(傳說)’, ‘이야기’, ‘현자의 가르침’ 등으로 번역했지만 적당한 번역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반틸(Van Til)이 바르트에게 Saga에 대해서 물었지만, 바르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영어로 번역한 브로밀리(Bromiley)가 대답을 간청했지만 답변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을 뿐이다. 바르트는 반틸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천박한 수준이고 자기에 대한 불쾌한 심경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리고 Saga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바르트에게 성경은 신화(神話, myth)가 아닌 사가인데, 그 사가가 신화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여 제시하는 학자는 없는 것 같다. 참고로 바르트와 동시대 위인인 불트만은 성경을 신화(神話)로 보았기 때문에 바르트와 다른 성경관을 가졌다. 필자는 바르트가 주장한 Saga는 기독교 성경과 ‘북유럽의 신화’를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한 것으로 이해한다. 즉 사가는 북유럽의 신화이다. 바르트는 ‘기독교 토착화(土着化)’를 시도해서 유럽형 기독교를 창안했다고 생각한다. 바르트는 ‘유럽 기독교’가 어떻게 ‘세계 기독교’가 될 것인가에 대한 방안을 체계화시켰다.

현재 우리 시대에 그리스-로마 신화와 함께 북유럽의 신화가 만연하다(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니벨룽겐의 반지, 지그프리트, 오딘, 토르, 록키 등등).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면서 그리스-로마 신전을 파괴하고 기독교 도시를 세웠지만 15세기에 이슬람에 정복되었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유럽에서 부흥했고, 세계대전 이후에 북유럽 신화까지 부흥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한국 신화와 연결된다면 매우 바르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신학 연구자들은 동양 철학의 ‘도(道)’와 기독교의 '로고스(Logos)'를 연결하여 이해하는 시도는 상당히 있다.

바르트가 주창한 “Saga로서 성경, Saga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바르트는 학(學)으로서 교의학을 제언했다. 자기 귀에 들리는 인간의 언설(Rede)을 스스로 가치평가를 해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유와 자기결단으로 인간 언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자유는 어떤 것(문자, 성경, 환경 등)에 제한받지 않는 자유이다.

saga는 내러티브의 한 유형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기능이 있다. 바르트는 saga에서 발생하는 의미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다. 바르트는 오버백(F. Overbeck)이 사용한 '원역사(原歷史, Urgeschichte)'를 창세기 1-11장으로 규정했다. 창세기에서 원역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원역사는 첫역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 오베벡은 기독교를 게쉬히테(Geschichte)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원역사는 게쉬히테의 처음이지, 역사(Historie)의 처음이 아니다. 게쉬히테는 사실은 아니고 허구도 아닌, saga이다. 게쉬히테는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역할을 한다. 문서의 사실성보다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에 관심을 둔다. 게쉬히테를 발생이라고 한다면, 다시 살아나는 ‘부활’로도 과격하게 표현할 수 있다. 우리에게 부활을 사용할 때도 게쉬히테적 부활인지 사실로서 부활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를 게쉬히테로 본다면 부활도 게쉬히테로 볼 개연성이 높다.

바르트가 성경을 saga로 규정한 것은 축자영감(逐字靈感, verbal inspiration)은 거부한 것이다. 신학도 다원화가 된 상황이다. 다원화된 구조에서는 자기 정체성을 더욱 명료하게 밝히지 않으면 개별화를 추구하는 다원화의 블랙홀에서 오히려 자기가 사라진다. 신학이 인간학이라고 하는 바르트에게서 saga가 어떻게 인간을 만드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신학하는 인간은 또한 어떻게 인간이 되는지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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