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예언’에는 ‘예언(豫言)’과 ‘예언(預言)’이 있다. 어떤 신학자가 두 단어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을 보고, 두 단어를 구분해야 하는지를 한학자(漢學者)에게 질문했다. 그 한학자는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라고 했다. [참고. 예(豫, 미리 예), 예(預, 미리 예) 예금(預金), 예산(豫算), 予(예)+상(象)과 혈(頁)이 결합하여 만든 문자이다]

우리는 통상 ‘예언’을 ‘미래의 일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영어에는 prophecy와 prediction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prophecy를 사용한다. 이것은 ‘신탁(神託)’인 ‘oracle’과는 다른 행위인 것 같다. 신이 말한 것을 전달하는 단어가 prophecy와 oracle이고, 우리말에서는 예언(豫言)과 신탁(神託)으로 구분하고 있다. 신(神)에게 무엇을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 전부 예언(預言)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신탁(神託)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언과 신탁을 명료하게 구분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신탁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사용하는 학자들도 있을 것인데, 일상적인 예언을 사용하지 않은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prophet’를 ‘선지자(先知者)’로 번역했다. 국어사전에서는 “예수 이전에 나타나 예수의 강림과 하나님의 뜻을 예언한 사람”로 정의한다. 개신교에서만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정의한 것 같다. 구교(천주교)에서는 ‘예언자’로 사용한다. 개역개정에서는 구약이나 신약이 모두 ‘선지자’로 사용한다. 고전 14:32에서 제시한 “예언하는 자들”은 일반명사가 아니다. 행 21:9에서 네 딸은 예언하는 자(did prophesy)로 행 21:10에서 아가보는 선지자(a certain prophet)로 제시했다.

우리 시대에 신사도 운동에서는 (자칭, 타칭) 사도가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선지자’는 부활하지 않는데, ‘예언자’가 부활하고 있다. prophecy을 행하는 prophet인데, ‘선지자’가 아닌 ‘예언자’이다.

우리는 국어사전의 의미를 잘 수용할 것을 제안한다. 구약 시대 ‘예언’은 “예수 이전에 예수의 강림과 하나님의 뜻”이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큰 뜻(구원)에 관한 것이다. 신약 시대에 예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아가보 선지자가 기근을 예언했고(행 11-27-28), 빌립의 네 딸과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을 것을 보아서 예루살렘에 가지 않도록 권면했다. 전자의 예언은 이방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을 부조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고, 후자는 사도 바울을 붙잡았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신약성경의 예언은 구약 시대와 다른 점이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다는 명령이 없는 것이다. 아가보는 성령으로 말했고(행 11:28), 성령이 말씀한 것을(행 21:11) 말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성령이 하신 말씀을 거역한 것인가?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려고 고의로 행동했는가? 예루살렘 교회는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울에게 지도했고, 바울은 지도를 따라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행 21:26).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의 예언이 ‘개인적 예언’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한 부분만을 본 것이다. 바울도 그 부분을 동일하게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 자신이 갈 것을 확신했고, 서바나까지 이를 것을 확신했다. 다만 그 방법을 알지 못했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때였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진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복음이 땅끝까지 가는 경륜을 본 것이고, 그 경륜의 부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은 것이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있다는 예언의 유형은 무엇인가? 고난의 상황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고난의 상황이 아니라 고난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고난을 피할 길을 알려주면, 듣는 자는 맹목적으로 피할 길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고, 혹 따르지 않더라고 꺼림칙한 마음을 지우지 못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예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예언의 유형은 과거의 죄를 사유(赦宥)하는 행위까지 있다고 한다. 과거의 죄를 알아 지적하고 회개를 종용하며, 예언자로 안수기도로 사죄(赦罪)를 행할까? 또 어떤 예언의 유형은 아들 낳고 딸 낳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아들을 딸로, 딸을 아들로 바꾸는 능력까지 행하는지는 모르겠다. 예언으로 대학이나 취업의 합격 불합격 여부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고 한다. 불합격을 합격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까지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성경은 선지자나 꿈꾸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신 13:1-5).

‘그리스도인’이 행하면 모두가 선(善)이 되는 것인가? ‘자칭 그리스도인’은 한국 교회 안에는 없는가? ‘적그리스도’는 666을 이마에 보이도록 새겨 놓았을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은 주의 은혜의 도리를 겸손하게 증거해야 한다. 겸손은 자기경험이 아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기경험이 중요하지만 자기경험은 주관이고 검증할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타인에게 전하는 것은 자기객관화의 오류일 것이다. 혹 유익이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잠간의 유익, 일시적 유익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2,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2,000년 동안 거짓 유형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다양화 되었을 뿐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하기 때문에 옳다는 견해를 주의하고 부정하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자며 구원의 탈락가능성을 주장으로 오용할 것이 아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은 자기부정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객관화시키지 말자. 객관화된 복음 문장을 더 많이 창안해서 규모있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추상적인 문장에 배부르지 말고,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지식을 이루자.

예언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잡히고 이해되고 파악되는 생명의 말씀이다.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무지하고, 예언을 무시하면 백성이 방자하다. 거짓 예언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참 예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방언기도 용례가 없듯이, 예언기도 용례도 없다.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거룩 세움을 목표로 한다.

선지자는 주의 예언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을 훈련시켰고, 언약의 땅에서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 백성을 책망했다. 그리고 메시아께서 오신 뒤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했고, 신약시대에 선지자는 사도의 사역을 돕는 역할을 했다. 사도의 주 임무는 복음 전파와 구제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예언은 개인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개인적 예언’이라는 표현은 ‘성경 한 본문’에서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가 다름에 대한 정당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설교를 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동일한 성경 본문을 설교할 때는 다르게 설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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