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주의 세계관에 대한 재성찰

최근 변혁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들인 데이비드 반드루넨이나 마이클 호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 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명칭을 따라서 소위 ‘에스콘디도 신학’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이 비판적 관점은 세상 문화에 대한 변혁주의자들의 집착과 승리주의적 태도를 경계한다. 따라서 일반은총론이나 문화적 산물에 대한 입장도 우리에게 익숙한 변혁주의적 세계관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드루넨의 신학적 입장

반드루넨은 이 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이 땅에서 우리들이 행했던 모든 문화적 활동은 갑작스럽게 종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구속은 원래의 창조를 회복하는 일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사역에 의지해서 새 창조를 쟁취하는 일과 관계 있다.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문화 활동은 아담에게 맡겨진 원래의 사명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루넨의 문제제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변혁주의적 세계관을 거명하고있지는 않지만, 사실상 책 전체 내용은 이런 메시지를 전제하고 있다. '오늘날 세상의 변혁을 부르짖는 일단의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애씀와 노력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장차 올 세상'의 문을 여는 것은 오직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진 사역이었으며, 우리 믿는 무리에게 다시 '왕적인 통치'의 사명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은 장차 사라질 곳이며,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들이 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창 8:22)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

반드루넨은 히 13:14을 근거로 ‘우리가 문화에 참여하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다만 그는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아담이 아니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일반 나라에서 수행하는 문화활동과 관련해서 고유한 관점을 개발하고자 할 때, 먼저 자신이 새로운 아담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속은 그리스도인을 에덴동산으로 되돌려 놓지 않으며, 태초에 아담에게 맡겨진 원래의 문화적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부과하지 않는다”

반드루넨에 의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에게 남겨진 문화적 책무 또한 크다. 그것은 문화명령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9장에서 노아에게 주어진 ‘수정된 문화명령’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생명을 일시적으로 보호하는 수동적인 역할만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첫 창조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새 창조를 얻으시고, 그 새 창조에 속한 복을 그 백성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첫째 아담의 사명을 회복하러 오신 것이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 그에 의하면 종말의 때가 되면 자연 질서는 파괴될 것이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지금의 세상과 새 창조 사이의 연속성은 오직 신자 자신 뿐이다. 이것은 변혁주의자들이 문화적 산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입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또, 우리가 속한 이 땅의 삶은 인류의 최종본향이 되도록 의도되지도 않았다.

반드루넨에 대한 평가

우리는 이러한 반드루넨의 입장을 어떻게 평가해야만 할까? 먼저 그는 '장차 올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안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다 보니, 우리 믿는 무리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요, 베드로가 말하듯이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통치의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들인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바로 이 땅에 임할 것임을 분명히 하는 데이비드 보쉬의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사명을 다해도 하나님의 통치를 다 도입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통치를 새로 여셨지만 완성시키지는 않으셨다. 그분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통치하실 것을 보여 줄 징후들을 - 더 많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분명히 더 적지도 않게 - 세우도록 부름 받았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근접한 상태와 그 나라의 예고편을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헌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Transforming Mission, p.35, at <세계관은 이야기다> p.147에서 재인용)  

이승구 교수도 마태복음 28장의 대위임령을 설명하면서 프란시스 나이젤 리(Lee)를 인용하면서 ‘예수의 대위임령을 다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옳게 지적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가 의미하신 것은 문화 명령을 포함한 모든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전포괄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권위 전체’에 바른 관심을 두는 것이 된다”(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p.213)

사실, 반드루넨과 같은 입장은 개혁파 내부에서도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극적인 문화변혁에 대한 반드루넨의 유보적인 태도 속에서 승리주의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변혁주의적 입장을 가진 리처드 마우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피력한 적이 있다.  

우리는 오직 수동적으로 예수의 빛을 받음으로써만 그 빛을 적극적으로 반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주님의 계명들에 겸손히 복종함으로써 우리는 억압과 고통의 세계 안에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의 빛을 밝힐 이러한 선행들을 할 수 있는 권능들을 받을 수 있다”(<미래의 천국과 현재의 문화> 중에서)

변혁주의적 세계관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마도 반드루넨의 주장이 다소 어색하고 못마땅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개혁파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다. 그의 주요 논지와는 상관없이 이 책 속에는 우리가 주목할 만한 풍성한 성경 신학적 통찰들이 많이 담겨져 있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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