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주여!”라고 부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송명덕 목사는 총신대학교 및 동 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탄에서 목회중이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새 관점 칭의론이 ‘구원탈락’으로, 전통적 칭의론이 ‘거짓신자’라고 주장하는 주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른 자들에 대한 관점 또한 매우 오해된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를 확실히 보여주는 ‘롤 모델“(role model)이 있다. 십자가 옆의 강도들이다. 두 강도는 모두 죄인이었고, 죄 가운데 죽어갔다. 그러나 한 강도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으로 자신을 구원할 분이심을 믿고 의탁하므로 즉시 구원받았다.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왜 다른 강도처럼 구원받지 못했는가? 죄가 더 많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멸망당한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다. 한편 강도가 구원받은 것이 다른 강도보다 더 많은 노력과 선행과 어떤 뛰어난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거야 말로 ‘오해 중의 오해’이다. 그는 다른 강도와 같이 전혀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구원받은 강도와 멸망 받은 강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다. 구원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말씀이 있다. 구원에 대한 위대한 말씀들이 있다.

¶ “누구든지(everyone)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the name of the Lord) 는 구원을 얻으리라(will be saved)”(롬10:13)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except by the Holy Spirit) 누구든지(no one) 예수를 주시라(Jesus is Lord) 할 자가 없느니라” (고전12:3b).

십자가 옆의 구원받은 강도도 ‘주 예수의 이름’을 불렀고, 주님으로부터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언을 들었지만 그들이 예수를 ‘주여 주여’ ‘Lord, Lord!’라고 불렀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구원받은 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주님에게 놀라운 고백을 했다. ¶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강도는 로마서 10장 13절의 약속을 들은 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 을 불렀다. ‘주의 이름’이란 누구의 이름인가? 유다 총독인 빌라도나 로마의 황제인 시저가 아니다. 예수이다. ‘예수’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주님의 이름의 의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단어는 ‘죄’와 ‘구원’이다. 한 단어로 말하면 ‘구원자’이다.

구원받은 강도는 놀랍게도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어떤 이름을 불렀는가? 그는 유대의 총독인 빌라도나, 로마 황제인 시저를 부르지 않았다. ‘주 예수’를 불렀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님의 이름을 알았기 때문에 부른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였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십니다!”라는 의미였다. 구원받은 강도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연약하고 수치스런 십자가의 상황에서도 ‘당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을 의탁했다. 강도는 이런 믿음의 집합체로서 ‘예수여!’ 라고 부른 것이다. 주님은 그런 강도에게 어떤 말씀을 선포하셨는가?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today) 네가 나와 함께(with me) 낙원(paradise)에 있으리라(will be)”(눅23:43)

성경의 가르침에서도, 구원받은 강도의 사례를 통해서도, ‘예수를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구원’이다. 구원의 특성을 모아 놓은 것은 ‘튤립(TULIP)’이라 불리는 ‘칼뱅의 오대강령’이다. 오대강령이 권위가 있는 것은 이것이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테스트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혹시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삼강오륜이나 화랑의 세속오계를 줄줄 외운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이라는 긴 문구를 외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날 것이다. 대다수의 독자들은 ‘아하!’하며 번지수를 찾았을 것이다. 혹시 논어나 맹자나 대학, 중용에 있는 유명한 ‘한문 구절이라는 쪽으로 감이 가든지, 간첩들이 사용하는 ‘난수표’가 떠오르는 독자가 있다면 지난 저녁에 먹은 감기몸살약 기운으로 정신이 혼미했든지, 아직 ‘참깨’인게 아니라 ‘들깨’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겠다.

혹시라도 ‘만나?’라고 외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독자는 ‘맞나?’를 ‘만나’로 잘못 썼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맞나?’가 아니라 ‘만나?’이다. ‘맞나?’(correct)란 ‘맞았어 틀렸어’의 의미이다. 그런데 ‘만나’(manna)란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려고 아침에 온 들에 이슬과 함께 내릴 때 쇼트트랙 금메달 4개에 빛나는 ‘김동성’뿐 아니라 ‘이동성’ ‘박동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던 말이다. 만나(manna)란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그래서 만나는 ‘하늘의 양식’이라는 뜻 외에 ‘전혀 뜻밖에 얻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만나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는 사람의 외침이다. 위의 ‘괴상한 문장’은 암호가 아니고, 조선왕조 이름의 약자이다.

성경은 ‘태’자로 시작해서 ‘멘’으로 끝난다. 창세기의 ‘태초에’로 시작해서 계시록의 ‘아멘’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혹시 연상력이 뛰어난 독자가 있다면 조선왕조와 성경의 첫 글자와 끝 글자가 같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연상력’은 ‘연상의 이성을 매혹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사물들의 연관성을 통해서 상상하는 능력’이라는 의미이다.

첫 글자는 ‘태’로서 조선의 첫 임금 ‘태조’ 이성계와 성경의 첫 시작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서 공통점이 ‘태’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지막 글자이다. 조선왕조는 ‘순’이고 성경은 ‘멘’인데 어떻게 같다고 연상했는가? 이럴 땐 좀 ‘언어 연상력 심화과정’의 내공이 필요하다. 조선의 마지막 왕은 ‘순종’이고, 계시록의 마지막 단어는 ‘아멘’이다. 아멘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다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순종’과 ‘아멘’은 쌍둥이라 할 수 있다. 머리를 잠시 식히자는 의도이지 역사공부 시킬 의도는 전혀 없다. 조선왕조의 긴 이름도 외웠던 독자들에게 칼뱅의 오대강령은 “식은 죽 먹기”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TULIP’의 각 항목을 새겨보자.

1.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속죄 (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인 은혜 (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따라서 십자가 옆의 강도는 구원받은 자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다고 하신 것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신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강도에게 주어진 칭의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것은 새 관점 칭의론의 ‘유보적 칭의론’이나 ‘구원의 탈락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전통적 칭의론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사람을 주님이 ‘알지 못 한다’고 했기 때문에 고심 끝에 ‘거짓 신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너무나 안일하고 부주의한 처사’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 옆의 강도처럼 주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양대칭의론의 결론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고, 이류도 삼류도 아닌 ‘오류’이다. 비록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을지라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믿은 자라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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