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게시한 행위는 역사의 한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루터는 그렇게 위대한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역사에서는 획기적인 행위로 평가한다. 한 사건에 대한 진솔한 반응이 세계 역사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1999년 한 세기가 가기전 루터파와 로마 카톨릭은 칭의교리 협약을 채택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독일에서는 루터의 선언은 보이지만, 선언의 내용과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루터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아직도 소수 루터파 그리스도인은 루터의 선언을 준수하려고 몸부림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아직도 종교개혁 진용에 위협은 계속되고, 종교개혁자들의 신음은 계속되고 있다. 독일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다.

천주교 전래 약 230년, 개신교 전래 약 130년이다. 100년이 늦은 선교 역사를 갖고 있지만 개신교는 위력적인 모습으로 성장했다. 천주교는 단일 종파임에도 다 종단의 개신교와 맞대응하는 위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불교, 유교, 기독교(개신교), 천주교로 구분할 정도이다.

지금 개신교에서는 천주교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다. 2006년 19차(서울 금란교회) 세계감리교대회에서 천주교와 의화교리 공동선언을 했다. 2013년 WCC 10차 총회(부산)에서 개신교(NCCK, 기장, 예장 통합, 백석, 순복음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맹(WCRC)이 천주교와 의화교리 합의문을 채택했다. 또한 루터교와 감리교는 천주교와 합의문을 직접 채택했다. 그리고 기독교장로회, 예수교 장로회(통합, 대신(백석))는 간접적으로 합의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방언을 행하는 로마 카톨릭(천주교)와 순복음교회는 방언에서 일치를 갖고 있다. 갖가지 예전(禮典)에서 천주교의 예식을 도입하고 있다. 교회력이 활성화되었다. 부활절이 전에 사순절은 거의 정착되었고, 이제 성탄절을 앞두고 대강절(Advent)이 살아나고 있다. 성찬에서도 빵과 포도주에서 다양한 형태의 성찬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성찬을 성탄절이나 송구영신예배에서 행하지 않고, 주일예배에서만 시행되는 것을 원한다. 개신교는 성찬을 개혁해서 사사로이 성찬을 시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도유(塗油, 기름부음)’라는 가시적인 예전을 행하지 않는다. 천주교 도유는 종부성사(終傅聖事, Extrema Unctio) 에서 시행하는 것으로 개혁파들은 사사로운 성례로 판단했다.

개혁된 교회는 더 이상 미사(Mass)를 행하지 않는다. 어떤 개신교에서도 미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미사는 미사 행위를 통해서 어떤 영적, 육적인 효능과 효과를 기대하거나 발생한다고 믿는 것이다. 영적 효과는 영적 발전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러한 의식을 ‘아편 주입’으로 분석했다(Religion als „das Opium des Volkes“).

천주교에서는 도유(塗油)는 사제가 전무한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말씀의 종교로 개혁해서, 목사나 누구도 도유의식을 행하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주의를 과격하게 도입시켜 ‘보이지 않는 도유(성령의 기름부음)’를 창안해서, 은혜받은 자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 이전 보 더 심각한 상태로 되돌아 간 것이다. 기름을 부는 주체는 오직 주님이시다(요일 2:27). 사제가 도유(기름부음)을 한다면 그래도 이해가 되지만, 주께서 행하는 기름부음을 모두가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가 성찬을 집례할 때에 한 집사님께서 피곤하고 아픈 몸이 치유되는 현상이 발생했는가 보다. 예배 후에 귀가하면서 간략하게 자기 현상을 말씀했다. 그 보고를 들을 때 큰 걱정을 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목적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그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성찬의 고유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 성찬은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에 있다. 병이 나았다는 기쁨에 주의 살과 피를 잊는다면 그 성찬이 유익한 행위일까?

어떤 분들은 인터넷에서 놀라운 기적 보고를 한다. 그런데 그 기적의 내용은 집 계약, 취직, 건강 등에서 드라마틱한 내용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한 기도조력자들을 부각시키는 행동을 자랑으로 삼는다. 기도조력자들은 그러한 보고를 자기 영적 스펙으로 삼는 경향도 있다. 많은 기적으로 취직을 시키고, 계약을 성사하고, 병을 치료한 것이 거룩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러려고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인가?

우리는 미사를 하지 않는다. 보이는 방식의 죄사함 구도와 기복적 성향을 배척하기 위함이다. 예배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목사들이 가운을 입지 않는 경우가 많아 더 볼 것이 없다. 그럼에도 예전이 없는 예배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이 약하기 때문에 예전을 강화시켜야 할까? 예배에 가장 강화되어야 할 것으로 복음의 내용으로 개혁했다. 복음이 죄를 씻기고 새롭게 할 유일한 양식이고 방편이라고 인지한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말씀중심 종교라고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를 하기 때문에 말씀 중심이라면 착오이다. 그 설교가 복음이어야 말씀 중심이다. 설교 행위에서 복음이 빠진 다면 예전이 없는 개신교의 예배는 몰락이다. 미사보다 더 못하기 때문에 미사적인 예전을 살리려 하는 것이다.

결국 종교개혁 이전 보다 더 추락된 개신교의 현실을 자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현실을 살리기 위해서 천주교로 돌아가야 할까? 더 힘든 개혁의 길을 세워야 할까?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