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주여!’ 라고 부른 자들은 '불신자‘ or ‘거짓신자’인가?

송명덕 목사는 총신대학교 및 동 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탄에서 목회중이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새관점이나 전통적 칭의론이 ‘주여 주여!’ 라고 부른 자들은 ‘불신자’든지 ‘거짓신자’라는 간주하는 것은 타탕한 것인가? 이들은 재림의 주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만일 이들이 ‘불신자’라고 하면 어떻게 재림의 예수님을 ‘주여, 주여’(Lord, Lord)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임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로마서 10장 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한다.

이들이 예수님을 ‘주여(Lord) 주여(Lord))’라고 부른 것은 이미 마음으로 주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결코 연극배우가 되어 ‘연기’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b)고 말씀한다.

주님은 ‘주여 주여!’라고 부른 자마다 ‘다(all)’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새 관점 칭의론은 ‘구원탈락’으로, 전통적 칭의론은 ‘거짓 신자’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천국=구원’ 즉 ‘천국과 구원을 동일시’에 있다. 그 결과 주님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것을 ‘구원탈락=천국탈락’으로 간주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전통적 칭의론이 ‘주여 주여’라고 하며 ‘대단한 일을 한 사람들’을 ‘거짓신자’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구원=천국’이라는 패러다임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과 동일시했고,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은 불신자라는 관념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나 ‘광수의 생각’이지 ‘성경의 생각’도 ‘주님의 생각’도 ‘하나님의 생각’도 아니다. 

양대 칭의론의 오류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나타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구원의 ABC’인 ‘솔라 피데’(Sola fide)라 불리는 ‘오직 믿음만으로’, ‘솔라 그라찌아’(sola gratia)라 불리는 ‘오직 은혜만으로’,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로 불리는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원리와 일치하는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는 무엇인가?

‘구원의 ABC’의 특징은 ‘전적인 은혜’이고 ‘무조건적’이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으로 ‘무조건적이지 않다.’ 구원의 DNA와 천국의 DNA에 대한 문제를 다룬 필자의 저서 『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 를 참조하라. 이와 같이 구원과 천국의 성격이 다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과 ‘천국’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같은 방면에 있는 좋은 것이지만,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즉 다시 말하면 ‘구원과 천국’은 하나님과 복음에 속한 것이고, 불신자나 세상과 죄와 마귀와 관계없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천국’이 아니라 ‘구원≠천국’ 이다. 즉 양자가 구별되는 것임을 가리킨다.

만일 양대 칭의론의 공통분모인  ‘구원=천국’ 즉 ‘구원과 천국을 동일시’로 본다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되는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천국=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 누구든지 ‘천국=구원’에 들어가려면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이 따라야 한다.”

독자들은 이런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십자가 옆의 강도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주님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언은 구원에는 어떤 ‘행함’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천국=구원’이 성립되기 위해서 적어도 구원에 대한 모든 말씀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 “오직 의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는 말씀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고 또한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바꿔야 한다.

¶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라는 말씀은 ☞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을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바꿔야 한다.

독자들은 이런 ‘복음의 수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19금’ 영화에는 미성년자 ‘입장불가’, 개콘에서는 ‘고음불가’, 형제와 자매들 간에게는 ‘비교불가’, ‘반지의 제왕’에는 ‘절대 반지’가 있다면, 성경의 수정과 변경에는 ‘절대불가’라는 것이 있다. 이미 칼뱅의 오대강령인 ‘튤립’(TULIP)에 언급한 것처럼 ‘구원의 DNA’를 한 단어로 융합한다면 ‘무조건성’이다. 이것의 다른 표현은 ‘전적인 은혜’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 외에는’ 어떤 조건도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런 원칙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구원과 천국의 개념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이나 홍콩인들이 자존심이 상할지는 모르지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며 표현한다.

“구원과 천국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같은 방면에 있으나 양자의 ‘차이나’(china)는 것을 아는 것은 영국이 100년이나 빌려 쓴 ‘차이나’(China)의 ‘홍콩반도’를 또 다시 100년 조차하는 것보다 값지다.”

이런 원칙은 이 말씀뿐만 아니라 모든 천국에 대한 말씀에 적용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성경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1)그들이 ‘행한 일’의 의미

재림의 심판의 날에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보고했는가?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Lord, Lord)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in your name) 선지자 노릇(prophesy) 하며 주의 이름으로(in your name) 귀신(demons)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in your name) 많은 권능(many miracles)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만일 이들이 선지자 노릇한 것과 귀신을 내쫓은 것과 많은 기적을 행한 A것이 거짓이었다면 주님께서 그들의 거짓을 드러내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이들이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in your name)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다른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주여 주여’라고 부른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in your name) 귀신을 쫓아냈다. 어떤 사람도 ‘주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귀신을 내쫒을 수 없다. 이들이 적어도 신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in your name)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내쫒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무리는 예수의 이름으로(in your name)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하지 않았는가!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주의 이름으로’(in your name)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거짓된 자들’이나 ‘불신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작지 않은 오류이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는 자’이며 심지어 ‘주님의 사역’을 위해 그들 ‘스스로 매우 큰 일’을 했다고 간주했다. 이런 일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한 신자’가 아닌 ‘사역자’ ‘주님의 종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을 전통적 칭의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거짓 신자’가 아니다.


(2) 주님 평가의 의미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주님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즉 ‘인정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은 마음의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분이다. 즉 다시 말하면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동기’와 ‘목적’과 ‘의도’를 아신다. 사람들이 볼 때 큰일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의 문제’이다. 만일 ‘구원=천국’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독자들은 이런 가정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구원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닌 천국의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과 천국의 문제는 ‘전제조건’ 즉 ‘DNA'가 다르다.

또한 모든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을 주여! 주여!’ 부르는 자들은 ‘거짓된 신자’가 아니라 ‘신자’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사역을 위해 대단한 일들을 한 ‘사역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 칭의론’의 주장과 같이 ‘주님을 주여! 주여!’ 부르는 자들을 ‘거짓 신자’로 단정하는 것은 바다낚시에서 삼치를 잡았다고 해도 이치에 맞는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런 단정은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들은 신자들일뿐만 아니라 대단한 일들을 함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받는 사역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전통적 칭의론’이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3)‘거짓 신자’라는 ‘전통적 칭의론’의 주장의 이면들

전통적 칭의론이 ‘구원탈락’이라고 주장하는 새 관점 칭의론에 대하여 ‘거짓 신자’라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이 있다.

첫째, 이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내게서 떠나라’고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오류의 뿌리에는 무천년설의 패러다임이 있다.

둘째, ‘전통적 칭의론’은 칭의의 ‘불변성’을 믿었지만(필자도 동의함) ‘구원=천국’으로 보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서 아무 문제가 없어야 했다. 왜냐하면 구원받을 때 이미 받았던 ‘칭의’로 최후의 심판을 통과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이 ‘버림받음’의 참된 의미는 알지 못했고, 그렇다고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거짓 신자’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전통적 칭의론의 관념으로는 ‘버림을 받는 자들’은 ‘불신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거짓 신자’가 아니라 ‘신자’들이다.

셋째, ‘전통적 칭의론’은 최후의 심판에서의 문제가 ‘칭의=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함의 문제’ ‘천국의 문제’라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

넷째, 신자와 불신자가 ‘한 날’ ‘같은 장소’에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데 일조했다.

다섯째, 신자들에 대한 ‘결산, 회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있다. 이것은 신자들에 대해 상을 주시는 특별한 개념이다. 최후의 심판인 백 보좌 심판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는 제4장 최후의 심판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4) ‘구원탈락’이라는 새 관점 칭의론의 주장의 이면들

새 관점 칭의론은 ‘내게서 떠나라고 한 대단한 사람들’을 ‘신자’로 간주한 것은 필자의 관점과 같다. ‘구원탈락’이라는 것은 그들이 신자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탈락’으로 본 것은 작지 않은 오류이다. 새 관점 칭의론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자.

첫째, ‘구원=천국’의 관념 안에서는 ‘구원의 탈락’ 외에는 어떻게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확언하건대 예수를 믿고 ‘칭의’를 받은 신자에게 ‘구원의 탈락’이란 있을 수 없다.

둘째, 그 결과 칭의에 대한 전혀 예상치 못한 ‘유보적 칭의론’을 낳았다. 사실 이것은 칭의의 문제가 아니다. ‘의의 문제’이다. 이 주제는 다음 장에서 다룰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유보적 칭의’는 ‘구원 탈락과 같이 보이는 부분’에 대한 ‘이해×2.5’이다. 칭의는 ‘죄의 사면’과 같기 때문에 신자의 최후의 심판인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결코 ‘사면을 취소’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칭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신앙생활 했느냐’ 즉 ‘의의 문제’를 보기 때문이다.

셋째, 적어도 ‘유보적 칭의’가 성립되려면 칭의받을 때에 ‘사람의 행위’가 ‘벼룩의 간’ 만큼이라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가정이 성립되어야 칭의에 문제와 ‘유보적 칭의’의 가능성이 ‘모기의 눈물’만큼 있다. 그런데 칭의란 ‘하나님이 전적으로 행하신 것’이기 때문에 백만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본 책의 기초가 되는 필자의 책 ‘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 제2장 ‘이것이 구원이다’를 참조하라)

새 관점 칭의론은 구원받은 신자 중에 최후의 심판에서 ‘문제가 있는 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전통적 칭의론과 같이 ‘구원’과 ‘천국’을 동일시했기에 마지막 결론에서 구원탈락‘이라는 오류를 범했다. 

(5)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기도

이 시점에서 일부 독자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인가?”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이 가진 ‘천국의 관념’이 매우 단순하고 편협한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강조하거니와 “구원받아 의롭게 된 신자는 결코 구원의 탈락 즉 지옥, 영원한 불 못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요한복음 17장은 주님이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신 내용이다. 여기에 구원받은 신자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 “6 세상 중에서(out of the world)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those whom you gave me)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They were yours)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17:6)

“신자들은 누구의 것인가?” 이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 발전한다. 구원받은 자들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때 ‘아들의 것’으로 주셨다. 주님은 ‘너는 내 것이다’라고 선포하셨다. 만일 새 관점 칭의론이 결론을 내렸듯이 구원받은 신자의 탈락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런 조건들이 성립해야 한다.

첫째, ‘아버지와 아들보다 더 크고 능력이 있는 자’가 구원받은 자를 ‘아버지와 아들의 손’에서 뺏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 각 신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보다 ‘더 큰 능력과 권세’가 있어서 아버지의 손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독자들은 이런 조건들이 가능하다고 믿는가?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날다람쥐가 1,000년을 연습하여 솔개와 같이 날라 다니거나,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날치가 2,000년을 연습해서 갈매기처럼 날아다니는 편이 오히려 쉬울 것이다. 필자가 독자들을 대신하여 말하건대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런 까닭으로 주님은 아버지의 것이고 아들의 것인 구원받은 신자가 단 하나라도 결코 잃어버릴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

¶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but the son of perdition)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

천국의 문제를 구원과 구별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은 ‘천국 상급’의 개념이다. 구원의 개념은 ‘은혜’로서 ‘무조건적’인 특징이 있고, 천국의 개념은 ‘무조건적’인 특성은 찾을 수 없고 ‘뛰어난 의’가 요구되고 이에 대한 ‘상의 개념’이 있다.

지금은 급한 대로 천국의 빙산의 일각이 ‘천국상급’이라는 것이지, ‘천국상급’을 안다고 해서 ‘천국의 진면목’을 아는 것은 아니다. 수학의 예를 들자면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에 이차 방정식을 푸는 것은 ‘천국상급’을 아는 정도이고, 로그, 함수, 기하와 벡터, 미적분 등은 ‘천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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