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창조’가 아니라 ‘전달’이다"

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한국교회가 용어사용에서 적지않은 혼란을 겪는 것은 영어 단어를 이상하게 번역(mistranslation)하면서 발생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번역한 사람은 등장하지 않지만 정확한 번역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 영어에서 성령은 ‘The Holy Ghost’로 사용하다가, ‘The Holy Spirit’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 변혁기가 20세기 초입, 한국선교 당시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선교 초기 삼위 하나님은 ‘성신’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1930년에 ‘성령’으로 고착되었다. 지금도 삼위 하나님을 ‘성신’으로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특히 선교사 중에는 왕길지 선교사가 끝까지 ‘성신’이라고 사용했다.

그런데 필자는 성령으로 번역을 제안한 사람을 '남궁 혁'으로 보았다. 신학지남에 등장한 명칭을 보면, 초기에는 성신을 사용하다가, 1930년 성령과 성신이 혼용되다가, 후기부터는 성령으로 일치되는 경향이 있다(참고, 고경태, “한국장로교회 100년의 성령 이해 고찰”, 2012년 개혁신학 학술대회 발표). 삼위 하나님을 성령으로 사용하지만, 왜 성신에서 성령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는 명료한 설명이 없다.

둘째, ‘중보기도’이다. 한국 교회가 사용하는 중보기도는 intercession에 대한 번역이다. intercession에 대한 성경에 연결된 단어는 ‘도고(禱告)’이다(딤전2:1). 그런데 누군가가 intercession을 중보기도라고 번역하여 소개했고, 성경 단어인 도고를 재치고, 한국교회는 중보기도가 넘치고 있다. 미국에서는 intercession 운동이 넘쳐 한국교회에 들어오면 중보기도 운동이 된다.

그런데 ‘중보(中保)’라는 단어는 기독교 전유어이다. 중재(仲裁), 중개(仲介) 등의 일반어를 mediator에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단어인 중보(中保)를 창안해서 정착시켰다. 초기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사역인 중보를 한국 교회에 바르게 정착시키려는 각고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독특한 '중보'에, 기도를 융합시켜, intercession을 중보기도로 번역했다. '도고'라고 번역해야 정상이다. ‘중재기도’, ‘중개기도’라고 했으면 좀 더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성경중심이라고 외치면서 성경단어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감지하지 못하고, 중보기도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정착시켰다. 이제는 오히려 성경에서 ‘도고’를 읽으면 생소하게 느낄 정도이다. 이제는 '도고'를 성경에서도 '중보기도'로 바꾸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열심히 ‘intercession(도고)’를 하고 있으면서, 출처를 알 수 없고 개념도 상상할 수 없는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모습일까? 도대체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은 '중보'를 하는 것일까? '중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은 중보자(中保者, Mediator)로서 기도하지 않으며 사역을 하신다.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다(갈 3:20, 딤전 2:5, 히 8:6, 9:15, 12:24, 요일 4:8-10). 예수님의 중보자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완료되었다(참고 롬 8:34). 예수님은 24장로의 경배와 성도의 기도를 받으시는 어린양이시다(계 4-5장).

셋째, Prophet이다. Prophet은 성경에서 ‘선지자’로 번역했다. 그런데 최근에 ‘예언자’를 사용하는 용례가 늘어난다. 선지자(先知者)와 예언자(預言者)의 차이가 없을까? 우리말에 ‘선지’는 ‘동물의 피’이다. ‘선지자’를 들으면서 ‘선짓국’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기 번역에서 Prophet을 ‘선지(先知)’로 번역했다. 일상적인 ‘예언’이 아닌 ‘선지’로 구분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보여준 계시(묵시)가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는 구속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지자의 대부분은 오심을 예언하기 전에 율법을 어기고 불순종하고 패역한 백성들을 책망하는 사역이었다. 그래서 선지자라고 했고, 선지자는 선지 사역,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서 율법을 지키며 메시야를 기다리도록 했다. 그러나 선지자를 환호한 사람은 없었고, 고난이 없는 선지자는 없었다. 

그런데 Prophet을 ‘예언자’로 번역하고, Prophecy를 ‘예언’이라고 번역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예언의 국어 사전적 의미가 한국 기독교 사상에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예언을 단순하게 미래 일을 예견하고 말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Prophecy가 개인사를 예견하는 일로 사용되지 않았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을 고난에 대한 Prophecy는 바울의 개인사이겠지만, 구속사를 이루시는 주 예수의 경륜에 쓰임 받는 한 종의 모습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구속 성취를 위해서 고난을 무릎 쓰고,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Prophet)의 Prophecy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참고로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와 여호와의 말씀이고, 신약에서는 선지자와 예언으로 소개하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선지자의 역할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학자는 1세기 예루살렘 믿음 체계를 바르게 전달시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 믿음이 성령의 사역으로 결정되지만, 복음 전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입술에서 행해진다. 복음전도는 소리와 문자로 진행한다. 우리가 체계화시키고 정립된 복음의 요체는 곧 중국이나 베트남, 동남아시아 등으로 다시 번역되어 전달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주요계기는 선교사들이 복음전달을 위해서 한글을 사용한 것이 상당히 크다. 19세기 말, 선교사들은 한자에도 능통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의 문자인 한글로 정경 번역을 시도했고 정착되었다. 그 선교사들이 우리 민족에게 전달시키려 했던 복음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계승해야 한다. 그러한 보화를 묻어버리고 자기 열정으로 교회를 꾸리려는 것은 역사적 교회를 세우는 자세가 아니다. 성경에 있는 고유한 단어인 ‘도고’와 ‘선지자’를 규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참고로 우리는 애급(埃及)이란 단어를 ‘애굽’으로 변개시켰고, 이제는 ‘이집트’로 정착시키려고 한다. 우리의 옛 명칭인 불란서, 서서, 화란 등에 어휘가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우리는 영국, 미국, 호주, 태국, 이태리 등은 정착되었지만, 다른 나라의 명칭은 정착되지 않았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