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책 3-1) 보이지 않는 영원한 말씀을 붙잡는 일이다.

해결책 3- 실천지침: 인간은 본성적으로 물질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다. 이런 인간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이대희 목사/ 예즈덤 성경하브루타 연구소 소장,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전 서울장신대 교수, 에스라성경대학원 대학교 성경학 박사과정 수료, 저서 <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이대희 지음, 베이직북스, 2016 세종도서 올해의 책 선정) <유대인의 탈무드식 자녀교육법> 외 200여권의 성경공부와 하브루타 관련 도서 출간. 지난 20여 년 동안 성서한국, 성서사람, 성서교회 비전을 갖고 한국형 예시바 성경학교인 예즈덤성경학교에서 (매주 월요일) 하브루타 방식으로 66권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유대인교육과 밥상머리를 오랫동안 연구했으며 현지 이스라엘의 정통 마을과 회당과 가정, 미국의 유대인 공동체를 방문하여 안식일과 회당예배와 탈무드 토론에 참여한 경험과 15년 넘게 밥상머리를 전파하고 있는 유대인자녀교육 전문가이며 사회적으로도 수많은 강연 경력이 있다

보이는 것을 이기는 길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면의 욕망이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숨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외적인 잘못을 고치기 어렵다.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잘못된 건물성전신학은 전시대를 걸쳐서 신앙과 교회를 흔드는 무서운 주범이었다. 그 안에 숨은 정체는 인간의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그 마지막은 사망이다. 처음 성전을 건축할 때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성전이 막상 건축되면 어느 순간에 성전건물이 신앙의 중심이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탐욕이 들어가면 본래 정신과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애급에서 오랫동안 익숙해온 물질과 외형중심의 삶의 방식을 하루아침에 벗어 던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대로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이미 아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를 주었는데 그것은 율법과 성막이다. 그리고 안식일과 절기다. 이것은 시간을 정복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주님의 선물이다.

율법과 성막은 모두 공간에 매이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안식일과 절기는 시간중심의 신앙의 모습이다. 움직이고 이동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보이는 공간인 땅을 이기는 길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정복하는 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비록 공간에서 살지만 공간에 머물지 않고 영원한 시간을 향해 가는 여정이었다. 이스라엘 신앙 역시 공간을 넘어 시간에 중심이 있다. 당시 공간인 땅을 중시한 고대제국들은 모두 멸망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땅을 가능한 넓게 정복하는데 공을 들였다. 바벨론은 화려한 공중 궁전과 헬라는 알렉산더 이름을 가진 도시 건설과 로마는 전 세계로 연결하는 길과 도시건설과 경기장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의 영광이었고 그들은 모두 멸망했다.

이스라엘 역시 시간 보다 성전이라는 건물과 공간에 매인 순간 고대제국처럼 멸망의 길로 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한 작은 그루터기의 이스라엘을 통하여 고대국가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라가 되었다. 시간은 영원하지만 공간은 일시적이다.

물론 공간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사는 한 공간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시간을 통해 공간을 정복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세상에 전할 메시지다. 공간을 최소화 하고 사람을 드러내기 위한 교회로 발돋움해야 할 것이다. 헬라 신전처럼 공간을 지키는 거대한 예배당 보다는 하나님이 고안한 성막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교회 모습이 우리의 교회당이 되면 좋겠다. 외적인 화려함 보다는 내적인 성도의 교통과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필요하다.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가 되려면 가능한 많은 건강한 중소형 교회가 좋다. 작고 건강한 교회일수록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하나 되어 빛과 소금의 역할하기 좋다. 움직이며 이동성이 좋은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다. 건물에 모이는 교회로만 교회가 정의되면 안 된다. 교회를 세운 최종 목적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다. 과감히 세상 속으로 침투하여 부패된 사회를 고치는 거룩한 사명을 지닌 교회가 주님이 꿈꾸는 교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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