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연재 신학덕담
황상화 목사의 『겨울채비 』

흔히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봄과 여름도 결국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유독 가을이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이라고 느끼는 것은 겨울이 가깝기 때문이지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른 봄 땅을 갈고 거름을 내고 씨를 뿌리는 것부터가 겨울 준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파종을 위한 모든 작업이 겨울 채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겨울이 아직은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깊이 해보면 겨울 채비는 가을에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언 땅이 녹기도 전에 부지런한 농부는 논밭에 거름을 냅니다. 논밭에 거름을 충분히 넣어야 최대한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비료가 아닌 유기퇴비를 충분히 준 곡식은 건강하고 병충해 피해에도 강할 뿐 아니라 땅이 산성화 되는 것도 예방합니다. 수확은 가을에 하는 것이고 그 수확은 곧 일체의 생산 활동을 할 수 없는 겨울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 활동에 몰입하고 인간 역시 생명체들의 생명활동의 리듬에 맞추어 활동해야하므로 생각을 깊이 할 수 없습니다. 가을 역시 생명체들의 활동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생명체들은 가을이 되면 자연의 변화와 함께 곧 닥쳐올 겨울을 직감하게 됩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답게 절기를 계산하여 가을을 피부로 느끼기 전부터 대비합니다.

하지만 기후 예측이 원시적이었던 때는 아무리 절기를 따라 대비를 한다고 해도 갑자기 돌변하는 이상기온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 이른 추위가 닥치면 낭패를 보기 때문에 수확의 계절 가을은 봄의 파종 때만큼이나 추수의 적정한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곡식은 수확의 적기를 놓치면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됩니다. 따라서 가을 농촌에서는 그 수확의 적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집마다 온 식구가 농작물 수확에 총 동원됩니다. 오늘 밤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농작물이 얼어서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기 때문에 급하게 서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처럼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거나 아예 일기예보가 없었던 때는 몸으로 느끼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날씨가 갑자기 오후 늦게부터 추워지기 시작하면, 특히 추위에 약한 고추나 무나 호박 등은 거둬 곡간에 들여야 하고 그럴 수 없으면 밭에 땅을 파고 묻고 짚으로 덮어주어야 합니다. 들판의 곡식들 뿐 아니라 추수 해다 놓은 것들도 냉해를 입지 않도록 호보해야 합니다. 농부들의 겨울 채비는 파종이나 추수 때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파종의 적기를 놓치거나 추수의 적기를 놓친 농부는 그 해 겨울을 힘들게 보내야 하고 이듬 해 보릿고개는 가족들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어릴 때 이웃집 할머니는 보릿고개에 먹을 곡식이 없어 산나물만 뜯어다 먹다가 채독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온 몸이 시퍼렇게 부어 고생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만큼 겨울 채비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나는 이 글을 구상하면서 마당으로 나가 감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등을 유심히 관찰해보았습니다. 봄이 되면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잎눈과 꽃눈을 관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직 색이 변하지 않은 나뭇잎 줄기 아래, 나뭇잎이 가지에 붙어 있는 지점에 잎눈과 꽃눈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정확하게 그 잎눈과 꽃눈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잎눈에서 싹이 날 때부터 다음해에 싹틔울 잎눈과 꽃눈도 함께 시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잎눈인지 꽃눈인지 몰랐는데, 모든 나뭇잎들은 가지에 붙어 있는 부분에 잎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나무들은 이른 봄부터, 겨울 채비가 아니라 다음 해 봄 채비를 합니다. 젊어서 노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자연이 주는 교훈은 사뭇 진지하기만 합니다. 

어떤 동물은 겨울 채비로 영양가가 높은 먹이를 많이 먹어 영양분을 몸에 저장하고, 어떤 동물은 따뜻한 곳으로 이동을 하고, 어떤 것들은 털갈이를 하고, 어떤 것들은 인간들처럼 먹이를 창고에 저장하기도 합니다. 지리적으로 늘 여름인 곳에서는 겨울 채비가 필요 없을 것이고, 오늘 날의 현대 도시인들도 겨울 난방을 위한 채비를 하지만 그 채비가 옛 농촌에서처럼 질실하고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 도시인들은 자연을 상대하며 살았던 옛 농경사회인들처럼 계절이 주는 교훈을 진지하게 받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시인들에게 가을은 풍성한 시적 감성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계절이고, 가을 단풍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나름의 가을 정취에 심취하는 매력적인 계절이지만 무엇보다 가을의 계절이 주는 이익은 인생의 가을 채비 교훈의 진지함과 그 중요성입니다. 

인생 교훈에는 젊은이들이 결코 진지하게 들을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 교훈은 학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이를 먹어야 이해가 되고 수긍이 가고 남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진지한 문제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늙고 약하게 되는 것은 실제적인 경험이고 느낌입니다. 젊었을 때는 자기 몸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허리를 느끼고 무릎을 느끼고 등을 느끼고 어깨를 느끼고 온 몸의 관절을 느낍니다. 눈, 귀, 코, 입, 목구멍을 느끼고, 위를 느끼고 심장을 느끼고 신경이 예민해집니다. 느낌은 아픔입니다. 아프지 않다는 것은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해서 몸의 어느 부분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무릎과 허리와 어깨가 시리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시린 것이 심하면 아픔이 됩니다. 이제 겨우 60 중반을 넘긴 나이에 나는 벌써 겨울에 두꺼운 실내화를 신지 않으면 발이 시리고 아픕니다. 아이들과 함께 레스토랑에 가면 사위와 딸은 아이스 워터를, 나와 아내는 핫 워터를 주문합니다. 나와 아내는 아이들이 아이스 워터를 주문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젊음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더운 날씨에 핫 워터를 주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면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가보다 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 따뜻한 것이 얼마나 좋은지 찬 것이 얼마나 싫은지 젊은이들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어서 이런 이야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맞지 않는 이야기일수도 있고, 80이 넘어서도 한 겨울에 매일 냉수마찰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일 뿐입니다.     

디모데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당시 정황으로 보아서 그는 머지않아 사형 집행을 당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도 칠십이 넘어서 노인이지만, 늙고 병들어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이 서신을 쓸 때가 가을인데 내년 봄 어느 때 쯤에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자신에 대해“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한 것을 보아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한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마치 마라토너가 먼 길을  달려와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믿음의 경주에서 결승점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경주를 한 눈 팔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이제 저 앞에 결승점을 바라다보면서 감회가 깊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 가족이 없는 그는 죽기 전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보고 싶었던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내년 봄 어느 날 죽을지 모르는데, 겨울이 오면 지중해 연안이 얼어 배가 다니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겨울 전에 오지 않으면 살아서 디모데를 보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인생의 겨울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겨울은 노인이 지내기에 너무나 열악합니다. 게다가 현대식 감옥이 아니라 토굴로 된 로마 감옥은 춥고 습하여 노인에게는 더욱 최악의 조건입니다. 바울은 자연의 겨울 채비와 인생 겨울 채비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 여행 때 거추장스러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벗어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신문지 한 장과 두 장의 차이를 헤아리는 노숙자들을 생각할 때 두꺼운 외투는 노인의 겨울 감옥 생활에 여간 요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온갖 험하고 두렵고 고생스러운 것을 다 경험한 바울이지만 이 편지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엿보입니다. 책은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아마도 춥고 습한 겨울 감옥에서 파피루스에 쓴 것이 아닌 가죽 종이에 쓴 성경이라야 오래 사용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 감옥에서 그는 마지막 시간들을 손때 묻은 성경을 읽으며 은혜의 추억들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에게 허용되고 가능한 겨울 채비는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이제 바울은 인생의 겨울 채비를 합니다. 그것은 그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들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를 따르던 이들이 그를 떠나가 버리는 섭섭한 경우도 많았고 배신자들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가 맞는 겨울은 추운 겨울이지만 외로움의 겨울이기도 합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가버렸고. 디도는 자기의 할 일 때문에 바울을 떠났습니다. 두기고는 선교 전략상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바울을 따르며 함께 했던 이들 중에 배신하고 가버린 사람, 자기 일을 핑계로 떠나가 버린 사람, 보낸 사람..., 이제 바울 곁에는 의사인 누가 한 사람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에 혼자 남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인생 겨울 채비의 정황입니다. 

바울은 데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고 당부합니다. 왜 마가를 데려오라고 했는지 기록이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추측을 해보면,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고 할 때 그 다락방의 주인입니다. 마가는 부잣집 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따라나섰다가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함께 했지만 거기서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2차전도 여행 때 따라가겠다고 하였는지 바나바가 마가를 데려가자고 하지만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기까지 하였고 결국 피차 갈라서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충성을 다했고 마가복음을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인생의 겨울 채비를 하면서 그 때 일을 뒤돌아보면서 자신이 마가에게 섭섭하게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가에게 섭섭하게 했던 일이 마음에 걸려서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이 많은 바울이 겨울 감옥에서 마가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어떤 일을 위해서라기보다 오해와 섭섭함을 풀어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질이 좋지 않은 못된 사람 알렉산더를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그 외의 자기를 실망시켰거나 배신한 이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허물을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내가 용서할 일은 내가 일방적으로 할 수 있지만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은 가능한 상대를 만나서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마가를 만나기를 원했고 그를 섭섭하게 했거나 배신한 이들에 대해서는 바울 자신이 일방적으로 다 용서했으니까 데모데에게 그들에 대해 말로나 행동으로나 비난하거나 부담을 주지 말라는 당부를 한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과 인간관계를 통하여 상처주고 상처 입은 모든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는 것으로 인생 겨울 채비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 2:14-16)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황상하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