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점의 대단한 사역자가 거짓신자나 불신자가 아닌 4가지 이유

송명덕 목사는 총신대학교 및 동 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탄에서 목회중이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①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의 문제

만일 그들이 거짓신자(불신자)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했다면’ 주님은 어떤 분이 되시는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이다. 참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잉태되셨고, 또한 참 하나님으로서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죄가 없으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내쫒고 권능을 행한 자들을 모른다고 하면 ‘참 사람’일 수는 있어도 ‘참 하나님은 아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필자가 확신하건대 이런 일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주님은 한 밤중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니고데모가 그의 방문 목적에 대하여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 아마 니고데모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아니! 나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분명하다.”

니고데모가 가진 의문을 묻기도 전에 먼저 대답하신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주님은 사람의 마음까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신자라고 간주하는 것은 ‘작아 보이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불신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② 심판자 자격의 문제

만일 주님께서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가? 주님이 어떤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과 ‘그 사람이 행한 일’을 아는 것이다. 주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런 의문은 ‘주님이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 ‘불신자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것을 의미한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불신자를 심판하시거나 신자를 심판하실 때, 그들과 그들이 행한 모든 행위를 아시지 못하신다면 아무도 심판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③ 산상수훈의 대상자의 문제

산상수훈에서 말씀의 대상은 ‘신자들’이지 ‘불신자’가 아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헌법으로 불린다. 천국의 헌법은 신자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지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은 ‘누구에게’ 주셨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법이지 ‘이방인들’ ‘불신자’에게 주시는 법이 아니다.

동일한 원칙으로 새 계명을 비롯한 천국의 헌법을 주시는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바닷가가 아닌 ‘산위에서’ 선포하셨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아닌 ‘제자들’에게 주셨다.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주목하자.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mountain)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his disciples) 나아온지라”(마5:1)

모세는 십계명을 시내산에서 받았지만, 천국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높은 산’ 위에서 능동적으로 선포하셨다. 모세는 율법을 ‘받은 사람’이지만, 주님은 천국의 헌법을 ‘주시는 분’이다. 말씀의 대상은 단지 ‘신자들’이 아니라 ‘제자들’이다. 이것은 산상수훈의 대상이 ‘불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제자들이란 이미 ‘구원받은 신자’이며, 훈련받아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과 비전으로 불탔던 네비게이토의 창시자인 도슨 트로트맨((Dawson Trotman, 1906-1956)의 말이다.

④ ‘하나님의 뜻을 행함 문제’가 의미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행함의 문제’를 평가하는 것은 ‘신자들만의 문제’이다. 불신자들은 주님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불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게다가 불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아무 관계가 없다.

오병이어의 표적 후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불신자들에게는 ‘무슨 일을 행하는 것’과 상관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것이 불신자에 대한 주님의 관점이다.

죽은 불신자들은 천년왕국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 전, ‘백 보좌 심판’에서 심판받고,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는다. 신자의 심판과 불신자의 심판은 결코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내용’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불신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요일3:10)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불신자들은 본질상 ‘마귀의 자녀’이다. 하나님께서 어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불신자)를 ‘같은 장소’, ‘같은 시간’과 ‘같은 관점’으로 심판하실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나 ‘광수의 생각’이지 ‘성경의 생각’도 ‘하나님의 생각’도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많은 귀신을 내쫓고 능력을 행한 사람들’은 비록 인정받지 못했을지라도 불신자든지 거짓신자가 아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불신자에 대한 말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신자를 대상으로 한다. 대단한 일을 한 사역자에게 ‘나를 떠나라’고 한 것이 주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거짓 신자’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새 관점 칭의론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 ‘나를 떠나라’는 것을 ‘제자의 문제’가 아니라 ‘칭의의 문제’로 간주했기 때문에 구원탈락으로 간주했다.

불신자와 신자는 ‘본질적’으로 ‘신분’이 다르다. 신자는 복음에 ‘순종’했고 불신자는 ‘불순종’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불신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마귀의 자녀’이다. 혹시 어떤 독자는 불신자를 ‘진노의 자녀’ ‘마귀의 자녀’라고 부르는 필자를 ‘외골수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광수의 생각’이나 ‘필자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다.

본질적으로 신분이 서로 다른 신자와 불신자는 심판의 모든 내용이 다르다. 신자의 심판은 ‘멸망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의 문제이며, 급한 대로 여기에서는 ‘상급’의 문제로 보면 실마리가 풀린다. ‘주여 주여’라는 자들에게 대한 문제도 ‘신자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제자인가의 문제’이다.

만일 ‘신자인가의 문제’였다면 전통적 칭의론의 주장과 같이 ‘거짓 신자’이기 때문에 ‘멸망 받아 영원한 불’에 던져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제자의 문제’이기 때문에 ‘천국의 문제’이다. 천국을 이해하는 좋은 개념은 ‘천국상급’이다. 천국을 코끼리에 비유하자면, 천국상급은 ‘코끼리의 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코끼리의 코를 코끼리라고 한다면 후하게 평가하면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어불성설인 것처럼, 천국상급을 천국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하다. 천국상급의 개념은 천국을 설명하는 ‘코끼리의 코’와 같다.

각설하고 양자의 차이, 즉 ‘신자인가?’라는 문제와 ‘참된 제자인가?’라는 문제의 ‘차이나’(china)는 것을 아는 것은 ‘차이나’(China중국)의 지리, 문화, 역사와 더불어 청나라 시대 숨겨진 보물이 묻힌 곳을 아는 것보다 더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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