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회에서 ‘3 · 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연세대 명예교수이신 김형석 교수님께서 ‘3 · 1정신의 현재적 의미와 우리의 과제’라는 발제를 하셨습니다. 김형석 교수,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대학자 중의 대학자로서 70,80년대에 책을 내면 기본으로 70만, 80만부를 기록했던 분이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인문학자로서 에세이스트라면 이 분은 철학자로서 에세이스트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분의 발제에 대한 논찬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제 원고를 받고 보니까 대학자의 원고치고는 너무 수수하고 밋밋한 것 같았습니다. 물론 급하게 원고를 보내셨겠지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원고를 바탕으로 해서 논찬 원고를 작성했고 부족한 부분을 첨가했습니다. 

교수님에 대해서는 책과 말씀으로만 접했지 실제로 제가 뵌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포럼 현장에서 뵙고 인사를 드리니 교수님은 이미 TV를 통해서 저를 많이 대했고 제 설교를 많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교수님께서 발제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원고와는 달리 정말 깊고 광범위한 내용으로 강연을 하시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100세나 되신 분이 그 깊은 내용을 한 마디도 버벅거리지 않으시고 일목요연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에서부터 정신,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인 상황들까지 말입니다. 순간 저는 논찬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냥 준비한 원고대로 하면 마네킹의 논찬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그 분의 발제를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메모를 한다 하더라도 메모한 내용과 제가 준비한 원고를 어떻게 잘 연결해서 논찬을 할 것인가가 염려 되었습니다. 논찬이란 발제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의 비평적 생각과 대안을 보충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이 하신 말씀을 요약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연히 청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르신의 반응이 아닙니까? 다행히도 그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발제보다 논찬이 훨씬 더 훌륭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즉석에서 강연을 잘 요약할 뿐만 아니라 원고에 없는 내용까지 정리를 잘하고 부족한 부분을 잘 보충하셨습니까? 소목사님 말씀대로 선교사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이야기 했어야 하고 한국교회의 역할을 좀 더 강조했으면 좋았을텐데 그 부분을 보완해주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 분이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렸는데 100세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건강하게 걸어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배웅을 한 후, 그 분이 가신 뒷모습을 보는 동안 문득 ‘100년을 살아보니’라는 그 분의 저서가 생각났습니다. 그 분의 책을 보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인생의 전성기가 60세에서 75세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65세에 연세대 교수를 은퇴하셨는데 오히려 그때부터 더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물론 작년 한 해만 해도 160회의 강연을 할 정도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지만,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의욕적이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생 황금기가 60세에서 75세였다는 것이죠.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저는 이제 전성기를 준비하고있는 때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전성기를 40대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40대에는 지칠 줄 모르는 패기와 열정이 있었고 건강도 뒷받침 해 주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일단 체력부터가 40대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김형석 교수님은 육신의 건강만 팔팔하다고 해서 전성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분을 뵙고나서 저는 다시금 인생의 클라이맥스로 가는 준비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그때를 향하여 체력을 비롯한 지적, 영적 능력, 기타 리더십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전성기가 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떻게 전성기를 맞고 그 전성기를 보내느냐 일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 나의 전성기는 어떻게 올 것인가. 행여 잠깐의 전성기를 맞다가 날개 상한 새처럼 추락하게 된다면 차라리 전성기를 맞지 않는 게 더 낫겠지. 그렇게 추락할 바에는 차라리 클라이맥스를 향하여 오르지 않는 것이 나을 거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전성기를 미루면서 여전히 나를 단련시키고 계시는 거야. 최고의 전성기가 왔을 때도 추하게 추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국교회 연합과 공적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말이야. 그래서 어쩌면 올해도 봄부터 소쩍새가 다시 울겠지.” 그런 생각을 할 때 다시 가슴이 시리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저의 전성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거렸는데 지금은 이토록 가슴이 시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미움받는 한국교회』

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는 그의 페이스북에 올린 『미움받는 한국교회』라는 제목의 목양칼럼에서 “요즘처럼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미움을 받은 적은 없는 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한국교회의 부흥과 함께 기독교 신자들이 청와대나 국회, 법조계 등 주요 요직에 앉게 되면서 한국교회는 견제와 공격을 받게 된 것”이란다.

또 “언제부터인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서민의 옷을 벗고 귀족의 옷을 입은 채 종교적 카르텔을 향성하며 이너써클화가 되기 시작했다”며 “몇몇 교회가 그런 빌미를 주어서 우리 사회의 빈정거림과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부정적 시대논리를 만들어 내고 비토 프레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면서 “목회자 이야기만 나오면 비난하고 공격하고 조소하는 시대적 정서와 트랜드가 생겨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종교인과세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시대가 교회를 무조건 미워하고 있다는 것, 특별히 큰 교회라면 더 그렇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분법적 비토프레임을 극복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시대적 과제”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소외된 이웃과 아픔당하는 사람들을 돌봐야 하고 교회를 더 투명하게 운영하며 역사와 사회를 보듬고 섬기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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