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가정을 회복하고, 가정은 사회와 교회를 세운다.

“가정예배모범”(1647년)은 스코틀랜드교회의 에든버러 총회(10회)에서 결정했다(15쪽). 우리가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장대선 목사의 <교회를 세우는 가정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인 가정 예배의 근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이전에 가정예배가 있었을까? 사도행전 베뢰아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세로마교회는 ‘복음선포(확실한 신앙)’가 아닌 ‘미사(맹목적 신앙)’로 종교 생활을 구성시켰다. 루터와 칼빈이 교회 개혁을 했다. 정두성 박사는 루터의 “소요리문답”(1529년)도 가정예배 용으로 의도가 있다고 제시했다(130쪽). <교리와 함께 하는 365 가정예배>(세움북스)의 저자 임경근 박사는 네덜란드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개혁교회 성도들의 가정생활을 소개했다(89쪽).

가정예배를 왜 해야 하는 것일까? 가정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영혼 훈련을 위한 첫 단계이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교회와 국가가 개인의 영혼을 주관하는 형태였지만, 종교개혁가들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국가와 교권이 아닌,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복음선포, 주일성수 그리고 365일 생활이다. 복음선포가 교회에서 시작하고, 선포된 이해의 시작은 가정에서 가장(家長)의 돌봄으로 진행하고, 개별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장대선 목사(가마산 교회), <프랑스신앙고백서 해설>(세움북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터디>(고백과 문답)을 저술한 진솔한 연구가이다. 그의 저술을 보면 근원을 밝혀 행동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행동의 원인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느꼈다. 교회에서 ‘가정예배’를 강조하는데, “왜 가정예배를 해야하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대선 목사의 <교회를 세우는 가정예배>를 읽는다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교회를 세우는 가정예배> 맹목적으로 가정 예배를 강조하다가 사그라진 한국 교회에 주는 단비이다. 말씀으로 가정을 세우려는 신실한 가장(家長)의 굳은 결심으로 주일성수와 매일매일주와 동행하는 여주동행(與主同行)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피상적인 지식은 미숙하다. 피상적인 지식을 갖고 행동하면 결국 숫자놀이에 불과한 삶이 된다. 참 지식은 숫자와 관계없이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지식은 신학과 일반학문에서 필요한 지식이고, 사람을 바르게 하기에 합당하다. 장대선 목사의 글은 명료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저자가 어휘 사용에도 매우 신중하고, 모든 자료를 제시할 때 최선의 확인 과정을 거친 뒤에 제시하고 있다. 장대선의 연구 활동은 어여쁜 아가씨가 은밀한 처소에서 한땀한땀 수(繡) 놓은 우아한 자수(刺繡) 작품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교회를 세우는 가정예배>도 그렇다. 장대선 목사는 아무도 찾지 않고 관심두지 않는 자료를 뒤져서 찾아내서 한국 교회에 소개해 주고, 다시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래도 장대선의 우아한 문체로 믿음의 명료한 문장을 볼 수 있으니 기쁨이 있다.

<교회를 세우는 가정예배>의 저자 장대선 목사는 “교회와 가정들을 위해 목사와 가장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 해설”이라고 소개했다. 강단에서 설교된 복음이 가정에서 이해되고 수납되는 체계적인 믿음 체계를 갖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목사의 설교와 가장의 해설로 복음을 소화한 건강한 자녀들이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일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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