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송명덕 목사는 총신대학교 및 동 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탄에서 목회중이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① ‘에그논’(egnon)의 의미

헬라어 원문은 “우데포테 에그논 휘마스”이다. ‘우데포테’는 ‘never’, ‘휘마스’는 ‘you’의 의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에그논’(egnon)이다. 혹시 ‘에그논’을 ‘계란論’으로 생각했다면 ‘에그머니’(egg money)가 없으면 계란을 살 수 없다고 걱정하는 사람과 같다. ‘에그논’은 ‘I  knew’의 의미이다. 헬라어 ‘기노스코’(알다) 동사의 아오리스트(aorist,부정과거형) 직설법으로서 ‘현재시제’가 아니라 ‘과거 시제’이다. 개역개정에서는 현재시제 ‘알지 못한다’로 번역되었다. 이는 ‘과거시제’의 중요성을 간과한 ‘작은 실수’이다. 따라서 과거시제로 번역하여 쉽게 풀어 놓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아마 이런 의미가 된다.  

“내가 도무지 너희를 이전에 한 번도 알지 못했다.”

이 말씀을 쉽게 풀어쓰는 것이 유익하다.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내가 지금에야 비로소 너희의 행위를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이제야 너희 행위를 알았다면 이전에는 몰랐다는 의미가 되지만, 나는 이미 전부터 너희들의 행한 일을 모두 알았기 때문에(not ‘인정의 의미’ but ‘인식했다는 의미’) 너희들이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행위를 인정 못한다. 너희는 ‘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너의 일’을 했고, 하나님의 뜻을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이들이 불신자나 거짓신자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들을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들이 신자로서 그렇게 ‘대단한 일들’을 행했는데 왜 주님은 이전부터 ‘한 번도 알지 못한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시는가? 계속되는 말씀에 그 이유가 나온다.

¶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you that work iniquity) 내게서 떠나가라(depart from me) 하리라”(마7:23b)

주님은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 부르셨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암시이다. 즉 그들의 신분과 위치가 ‘법을 따라 행한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모든 일들을 주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내쫒고 권능도 행하는 등 대단한 일들을 행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그들이 한 일은 분명 ‘악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일’이고, ‘작은 일’이 아니고 ‘대단한 일’이다. NIV 성경은 ‘많은 기적들’(many miracles)로, KJV은 ‘많은 놀라운 일들’(many wonderful works)이라고 번역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도 그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이것은 그런 놀라운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라 행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그런 대단한 일에 감동한다. 주님께서 보시는 중심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7:21)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에 ‘멘붕’내지는 ‘우먼붕’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지옥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이 ‘광수의 생각’과 같지만 ‘성경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과 멀어도 한참 멀다는 증거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 즉 주의 재림으로부터 이 땅을 통치하실 천년왕국의 ‘왕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예레미야 vs 발람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을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을지라도 왕과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핍박을 당했다. 그는 참된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했기 때문에 그의 일을 주님께서 아시고 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 중에는 ‘늙은 선지자’도 있고 ‘어그러진 길’을 가는 선지자도 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선지자 발람에게 귀인들을 보내 수많은 금은보화로 유혹했다. 선지자 발람은 하나님을 계속 졸랐다. 하나님께서 가도록 허락하신 것은 적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소극적인 의미였다. 발람이 이방인의 요구를 따라 가려했던 이유는 그들이 주는 재물 때문이었다. 유다서는 발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profit)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유1:11)

선지자 발람은 신자였고 선지자였지만 물질에 눈이 어두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갔다. ‘그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는가? 유다서는 불신자에게 보내는 서신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따라서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라고 불려진 사람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이다.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의의 삯, 불의한 이익’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갔다.

유다서의 ‘화 있는 자’나 ‘발람 선지자’는 모두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였다. 게다가 사역자였다. 그러나 잘못된 길,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갔기 때문에 ‘화 있는 자’로 언급되었다. 발람 선지자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나를 떠나라”고 하실 것이다. 이것은 산상수훈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내가 너희의 행한 것을 한 번도 알지 못했다.”(I never knew you)는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구원을 잃어버리고 지옥에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일 ‘구원탈락’의 의미였다면 ‘행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음’을 언급하셨을 것이다. 또한 구원받는 것이 ‘행함의 문제’라는 기형적 신학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증거들은 이들의 문제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 ‘천국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천국에 대한 말씀은 전적으로 ‘신자들에 대한 것’이다.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주의 종들은 발람의 예를 경고로 삼아야 한다. 이 땅에서 유명하고 대단한 주의 종노릇 했다고 해서 반드시 주님이 칭찬하실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관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사역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히 행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신자들과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종의 경우, 주님께 인정받는 종도 있겠지만 주님께 인정받지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레미야와 같이 비록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한 종일지라도 주님께 인정을 받는 종도 있을 것이다. 혹시 사람은 잘못 평가할지라도 주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평가하신다. 우리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주님께 인정받기를 힘쓴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교회마다 신실하게 섬기는 성도들이 있음은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때때로 어떤 신자들은 시간을 쪼개어 열심히 수고하고 자신의 물질을 드려 섬기는데 그 열매가 좋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 열매란 그런 섬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섬김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일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은 아니다. 교회에 덕을 끼치는가의 여부는 교회의 지체들이면 누구든지 분별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보다 ‘교회에 덕’을 끼치는 문제가 ‘더 높고 크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여부는 혹시라도 분별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을 분별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작고 낮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하나의 원칙을 내릴 수 있다. “적어도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섬김은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한 ‘최댓값’이 아니라 ‘최솟값’이기 때문에 우리들도 분별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교회를 섬기는 일들이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한다면 주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고, 주님이 기뻐하시기보다 자신이 기뻐하고 좋아서 하는 일일 때가 많다. 성령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섬긴 결과이다. 이런 섬김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는 있어도 장차 주님의 칭찬이나 주실 상이 없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 그 마음과 동기까지 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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