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여 주여’ 라고 부른 자들에게 ‘불못에 들어가라’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송명덕 목사는 총신대학교 및 동 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탄에서 목회중이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①  ‘불못에 들어가라’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만일 ‘내게서 떠나라’는 것이 ‘구원탈락’ 즉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면 주님은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며 ‘나를 떠나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라’고 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염소들과 가라지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염소에 대한 주님의 원칙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염소들로 불린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주목하여 보자.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the devil and his angels)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 the eternal fire)에 들어가라”(마25:41)

주님은 염소들로 간주된 자들에게는 ‘영원한 불에’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님을 ‘주여 주여’라고 불렀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며 선지자 노릇하며 능력을 행한 사람들 즉 대단한 일을 한 자들에게는 왜 ‘불못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왜 단지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는가? 만일 이들이 새 관점 칭의론이 주장하듯이 ‘구원탈락’이라고 하면 염소들에게 하신 것처럼 ‘불못으로 들어가라’고 하셔야 했다. 그런데 ‘불못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독자들은 양자를 동일하게 ‘불못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 동일한 불신자라면 똑같은 원칙을 가지고 말씀하셔야 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단한 일’을 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염소들에게 ‘직접적으로 저주’하신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이것을 실수나 우연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작은 단서’에도 주님의 관점과 원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염소들은 복음도 믿지 않고 주님을 대적했던 ‘모든 나라ㆍ이방ㆍ열방ㆍ불신자’들이어서 ‘마귀와 영영한 불 못’으로 들어갈 것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대단한 일을 했으나 ‘인정받지 못한 자들’에게 ‘불 못에 들어가라’고 하지 않고 ‘나를 떠나가라’고 한 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신자였기 때문이다

ⓑ 가라지에 대한 주님의 원칙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에도 이런 원칙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고(마13:38) ‘가라지’를 뿌린 자는 마귀이다.(마13:39) 주님이 가라지에 대해 무엇이라고 선언하셨는지 주목하자.

¶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13:41-42)

독자들은 염소들과 가라지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관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염소들에게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한 것처럼, 가라지들에게도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셨다. 이들에게 ‘동일한 심판’이 주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염소들도 불신자이고, 가라지도 악한 자의 아들, 불신자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대상이기 때문에 동일한 심판이 선언되었다. 이것이 ‘심판자이신 주님의 원칙’이다.

불신자들은 모두 복음에 순종치 않고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풀무 불에’ ‘영영한 불에’ 던져질 것을 말씀한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지만 ‘주를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대단한 일을 한 사람들은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이기 때문에 ‘영영한 불 못에 들어가라’ ‘풀무 불에 던져넣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즉 ‘어디로의 문제’가 언급되지 않고, 온 세상에서 적극적이신 분인 ‘내게’(예수님)가 언급되며, ‘나에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이 차이를 보지 못한다면 불신자든지 ‘거짓 신자’로 오해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나 ‘광수의 생각’이지 ‘주님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다.

② 불신자는 ‘어디로 가라’의 문제 VS 신자는 ‘주님으로 부터’의 문제

필자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주님은 ‘부족함’도 없고 ‘과유불급’ ‘넘치는 것’도 없이 꼭 필요한 말씀을 하신다. ‘대단한 일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 주님의 관점은 ‘어디로’의 관점이 아니라, ‘내게서’의 관점으로 언급하셨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그들이 ‘영원한 불’과 관계가 없는 사람 즉 불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내게서 떠나라’는 것은 ‘불 못’과 같이 소극적인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 즉 ‘주님의 임재’와 관계있다. 따라서 ‘내게서 떠나라’는 것은 ‘주님의 축복에서 떠나는 것’ 즉 ‘주님의 임재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임재’와 관련해서 소극적으로나마 ‘떠나라’고 언급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할 신자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너희는 내가 ‘너희 안’에 ‘내적으로’ 성령으로 임했을 때에 ‘나의 임재 가운데’ ‘나의 다스림 안에’ 사역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하여 온 땅을 다스릴 만왕의 왕으로 왔을 때 ‘나에게서 떠남’으로 ‘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너는 나와 함께 ‘왕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스스로 왕이 된 것’에 대하여 징계를 받아야 한다.”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서 불신자와 관계있다. 그런 까닭으로 염소들에게 “사단과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하셨다. 그들에게는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 없다. 불신자이기 때문에 ‘주님’의 대적인 ‘사단’이 언급되며, 사단이 던져질 ‘영영한 불’이 언급된다.

‘주님의 임재’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신자들’과 관계있다. 비록 대단한 사역을 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지만’ 구원받은 신자이기 때문에 ‘사단’이나 ‘영원한 불 못’이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것과는 관계 없다는 것은 이들이 불신자가 아니라는 암시이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임재’와 관계있기 때문에 ‘내게서 떠나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볼 때 이 땅에서 대단한 일을 행한 종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행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행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오셔서 회계할 때에도 ‘주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는 곳, 즉 ‘임재의 바깥’ ‘주인의 즐거움의 밖’에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임재로 부터의 떠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올 때 ‘왕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의 즐거움’으로 언급됐기 때문에 이런 말씀일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의 즐거움, 천년왕국의 즐거움의 밖에서 징계를 받고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

③ 잘못된 기초 : 무천년설

주님은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내쫒고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하)고 하셨다. ‘새 관점 칭의론’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내게서 떠나가라’는 것을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의미의 ‘구원의 탈락’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관념은 『지옥 가는 크리스천들』(변승우 저, 은혜출판사)이라는 책에도 나타난다.

“아무리 정확히 신앙을 고백해도, 아무리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듣고 그 말씀을 깨달은 자라도, 심지어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라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 멸망을 받는다.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지옥 가는 크리스천들 196쪽)

얼핏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신자와 불신자는 본질적으로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심판의 시기와 장소와 내용이 전혀 다르다. ‘불법을 행한 것’은 천국의 조건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선언하셨다.

필자가 볼 때 ‘주여 주여 하는 자’에 대하여 전통적 칭의론은 ‘거짓 신자’로, 새 관점 칭의론은 ‘칭의를 받은 신자의 구원 탈락’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뿌리는 ‘무천년설’이다. 그릇된 기초 위에는 잘못된 기둥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천년왕국설은 ‘천년왕국’을 중심으로 ‘주님의 재림’의 선후관계로 나뉘어지는데 ‘무천년설’(Amillennialism)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이 있다.  ‘전천년설’은 주님의 재림이 ‘전천년’ 즉 ‘천년왕국 전’에 온다는 학설이다. 먼저 주님의 재림이 있은 후에 천년왕국이 있다는 의미이다. ‘무천년설’은 ‘현천년설’이라고도 부른다. 주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신 초림으로부터 재림사이의 기간을 천년왕국으로 보고, 재림으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는 학설이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학설이다.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의 경우 주님 재림하기 이전인 현재가 천년왕국 기간이고,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즉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구원의 탈락처럼 보이는 신자들’의 문제를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독자들 가운데 인생의 코치나 눈치가 있다면, 칭의론 논쟁을 다루는 필자의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가 ‘천년설’ㆍ‘천년왕국’에 대한 부분이라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감지덕지’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바늘구멍 같은 빛’도 감지하여 반응하는 필름과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지’할 수 있다.

사실 양대 칭의론 논쟁에서 ‘칭의’와 ‘성화’ 만을 중요한 이슈로 삼았다. 물론 빙산의 일각과 같이 ‘그 자체’에도 문제의 열쇠가 있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은 칭의론 논쟁이라는 빙산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부분’이 ‘구원과 천국의 동일시’ ‘천년왕국의 문제’ 그리고 이어서 다룰 ‘칭의와 의의 문제’ ‘최후의 심판’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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