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2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간혹 정상적인 사람이 심한 지체부자유자와 결혼해서 평생을 헌신하며 사는 경우를 볼 때, 우리는 그 놀라운 사랑에 감탄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아무리 놀라워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고 이해가 되는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은 아무리 사랑해도 (저와 아내는 우리 아이들이 엄마 아빠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아 라고 할 정도로 서로 깊이 사랑합니다.) 거의 예측이 가능합니다. 지금쯤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타임이구나 생각하면 틀림없이 여보, 사랑해~ 합니다. 반대로 지금쯤은 한 소리 하겠구나 하면 틀림없이 한 소리 합니다. 한 소리 할 타임에 사랑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한 소리 할 상황에 예측을 뛰어넘어 사랑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무릇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크고 놀라워도 거의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가 가능한 사랑이고 예측이 가능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인간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으로 도저히 상상이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며 예측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사도는 그 사랑을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식에 넘친다고 번역된 이 말은 지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사도는 교회와 성도는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위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우리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엉망으로 살아왔나? 하는 것입니다. 어디 하나 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전부 죄에 관한 생각이었고, 말하고 숨 쉬는 모든 것이 죄로 살아온 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전에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별로 악하지 않고 욕 들어 먹지 않을 정도로는 살아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교만했고 완악했고 비뚤어진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이 그런 자신을 얼마나 오래 참으셨고,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상상과 이해를 초월하는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설명하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1. 먼저 넓이가 있는 사랑입니다. 넓이는 사랑의 대상에 관계된 표현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 혹은 호감이 가는 사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누구든지 사랑하자고 하지만 사실은 얼마나 학연, 지연, 피부색, 인종, 이런 것을 따지는지 모릅니다.

백인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우월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들 중에는 심하면 애완용 개나 고양이 보다 유색인종을 더 차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대상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안 된다. 아무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평생 죄만 지으며 살아왔던 십자가의 한편 강도, 창기, 세리, 죄인, 실패한 사람.....,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노예상인이었던 죤 뉴턴 같은 사람은 자기 같은 사람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고 찬양하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을 어떤 자격에 의해 제한해 놓으셨다면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넓이에 있어서 우리의 지식으로 측량할 수 없는 넓이를 가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2. 사랑의 길이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길어야 백년입니다. 일단 그 이상 살지를 못합니다. 또 우리의 마음이 너무 자주 변하기 때문에 길게 가지를 않습니다. 요즘에는 결혼식 때 서약하고 신혼여행가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죠. 오래가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권태기가 있습니다. 기분 따라 변하고 감정 따라 변하고 상황 따라 변합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끼리 뭐라고 합니까? 너와 나의 우정은 영원하다. 너와 나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학교 벽에 적기도 하고 산에 올라가서 바위에 새겨놓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가던가요? 산에서 우리의 우정은 영원하다 새겨놓고 바로 산을 내려오다가 다투고 갈라진 경험들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여자분들 보면 서로 마음이 맞고 죽이 맞을 때는 화장실 갈 때도 붙어 다닙니다. 그런데 아침에 그렇게 하다가도 점심때 또 토라지고......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분초 같습니다. 반짝 있다 없어지는 새벽이슬 같습니다. 아침에 피었다 지는 들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해서 영원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그를 배반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와서 설득하시고 마침내 영광스럽게 변화시키고야 맙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
사람들은 순간적인 감정이나 즐거움, 자기의 행복을 위해 남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순간적인 즐거움이나 한순간의 기쁨을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목적이 저속하거나 저질스럽지 않습니다. 그 목적이 지극히 높고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입니다.

벧후1:3-4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기 되게 하려 하셨으니”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리까지입니다.

엡2:5-6절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렇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 우리의 신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앉혀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걸맞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서 우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좋아하고 쾌락을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고 우리와 더불어 싸우면서 끝내 사랑의 고귀함과 높은 수준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4.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깊은 부분을 만지고 치료하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수술하는 것 보면 직접 칼로 째고 하지 않아도 레이저로 우리 속 깊은 곳도 치료하는 방법이 많이 개발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레이저 광선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우리 내면의 깊은 곳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온갖 죄와 상처, 열등감, 낙망하는 마음, 좌절감, 교만, 영혼의 병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상처와 고통과 아픔 속에 파고 들어와 하나하나 다 치료하는 사랑입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다른 어느 것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나의 영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죄와 열등감, 근심, 상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말씀과 사랑으로 치료하십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 물 길러 온 수가성의 여인을 아시죠? 이 여인은 아무도 우물가에 나오지 않는 한 낮에 물을 길러 올 정도로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했던 열등감과 상처가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자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완전히 치료하셔서 그 여인이 그렇게 피해 다녔던 사람들에게 나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당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 속에 있는 깊은 상처, 좌절, 열등감, 영혼의 병을 다 치료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간혹, 그렇게 깊은 나의 죄와 상처를 만지고 치료하시는 분이 왜 지금 나의 문제와 어려움은 외면하시냐고 원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높은 목적을 이해하게 되고 이 땅의 다른 고통당하는 인생들을 이해하는 풍성한 사람으로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성공은 모든 사람이 다 누리는 보편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통은 누구나 맛보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성도들을 그 보편적인 고통과 상처에서 빨리 치료해주지 않는 것은 그 고통과 상처 때문에 아파하고 신음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병원 입원실에 한번 가보십시오. 거기는 다 한 마음입니다. 서로 전화 받아주고 서로 위로해 주고..... 같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죠.

다른 사람을 많이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냥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돈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남을 축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으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치료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겪었던 그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그냥 보지 않습니다. 불쌍히 보며 위로하고 도와줍니다.

왜 우리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며 그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합니까? 그래야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지식에 넘치는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알게 된다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과 뜻이 싫고 귀찮고 힘들어도 마음에 계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랑에 감복하여 주께로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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