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만일 “주의 이름으로 대단한 일을 한 자”가 불신자나 거짓신자라면?

저자 송명덕 목사는 오직 한 길만을 간 목사이다. 총신대학교와 총신대 학 신학대학원과 총신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화성 동탄의 제자비전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9. 만일 “주의 이름으로 대단한 일을 한 자”가 불신자나 거짓신자라면?

이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불신자와 둘째는 거짓신자인 경우이다. 이런 가정을 통해서 이들의 ‘누구인지를’를 볼 수 있다.

① 불신자일 경우

만일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고를 받은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불신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다고 하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구원은 선행을 통해 받는다”는 기형적인 구원론과 일맥상통한다. 어떻게 주님께서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오해’이지 ‘주님의 실수’가 아니다. 더구나 이런 가정은 불신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과 귀신을 내쫒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나 ‘광수의 생각’이지 ‘성경의 생각’이나 ‘주님의 생각’은 아니다.  사실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양대 칭의론에서도 ‘불신자’라는 가정이 없고, ‘거짓 신자’로 단정했다.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와 필요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즉 다시 말하면 신자들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다. 신자들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이란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것’이고, 구원받은 이후에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② 거짓 신자일 경우

만일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고를 받은 ‘선지자 노릇하고 능력을 행한 자들’이 거짓신자이기 때문에 구원탈락‘이라고 하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주님을 믿지도 않은 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내쫒고, 권능을 행했다’는 의미가 된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이 그런 일을 행할 수 있다든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사칭하면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은 ‘열려라 참깨’나 ‘도깨비 방망이’나 ‘램프의 요정 지니’에게서나 있는 일이다. 그것도 ‘옛날 이야기’나 ‘픽션’에서나 있는 일이다. 독자들은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나 ‘광수의 생각’이나 ‘성령을 돈으로 사려는 마술사 시몬의 생각’이지 ‘주님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과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을 들은 놀라운 일을 행한 자들에 대하여 양대 칭의론은 모두 본질을 보지 못했다. 새 관점 칭의론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위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주님이 말씀하신 ‘알지 못한다’ ‘내게서 떠나라’를 통해서) 그러나 신자와 불신자는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시기’, ‘다른 장소’, ‘다른 내용’으로 심판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구원에서 탈락된 신자’로 결론을 내렸고, ‘유보적 칭의론’이라는 잘못된 종착역에 이르렀다.

필자가 볼 때 이것의 근본 원인 중의 하나는 ‘무천년설’에 있다. 이 학설은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 때 까지’ 즉 현재가 천년왕국 시기이고, 주님의 재림으로 신자와 불신자를 ‘백 보좌 심판’에서 ‘한 번에’ 심판하신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고 보기 때문에 ‘탈락으로 보이는 신자’(필자가 보는 관점: 구원탈락으로 잘못 보았다는 의미)를 ‘영원한 불’에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 칭의론은 ‘칭의의 불변성’을 끝까지 붙잡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칭의의 ‘불변성’을 한편으로 잘 이해했다는 의미) 새 관점 칭의론과 같은 관념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신자의 심판인 ‘그리스도의 심판’과 죽은 불신자들의 심판인 ‘최후의 심판 or 백보좌 심판’을 구별하지 못했다. 혹시 다른 것으로 보았을지라도 ‘같은 시기’에 있는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짓 신자’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전통적 칭의론이 ‘거짓 신자’라고 결론을 내린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구원받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으로 오해했다. 또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을 “주님을 떠나서 가는 곳이 지옥 밖에 더 있는가?”라는 생각은 ‘거짓 신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이것은 전체를 보지 못한 짧은 생각이며 논리의 잘못된 비약이다. 이런 오류를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은 천국을 구원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만일 ‘주여 주여’라고 부른 사람들이 불신자였다면, 염소로 간주된 자들에게 선언하신 것처럼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셔야 했다. 만일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대하시지 않는다면 주님은 약간의 ‘불의한 분’이시든지 ‘실수가 있는 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다.

주님께서 ‘염소들로 간주된 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주여 주여’라고 부른 자들에게 하시지 않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적어도 ‘대단한 사역자들’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구원받은 신자’였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들의 문제는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주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것은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실 ‘주인의 즐거움’으로 비유된 천년왕국에 참여하지 못할 것을 의미한다.

➂ 고전 3장의 건축자의 비유 구원의 문제인가?

대단한 일을 한 사역자가 구원탈락과 거짓신자인가 라는 문제를 규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성경은  고린도전서 3장의 건축자의 비유이다. 여기에서 새 관점 칭의론과 전통적 칭의론이 전혀 보지 못하고 서로 갑론을박 논쟁했던 구원과 천국의 구별을 볼 수 있다.

¶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3:10-15)

고린도전서 3장의 건축자의 비유를 보자. ‘터의 문제’는 ‘구원과 칭의’의 문제이다. 본문의 초점은 ‘터의 문제’에 있지 않고, 그 위에 집을 세우는 문제에 있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었다면 공력이 불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 받을 상이 있다. 그러나 나무와 풀이나 짚으로 지었다면 그 공력을 시험하는 불에 타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음으로 상을 받지 못한다.

독자들은 건축자의 비유가 ‘구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일편단심 번지수가 맞다고 고집한다면 ‘옆 동네’의 같은 ‘번지수’를 찾은 것이다. 만일 이것을 ‘구원의 문제’로 본다면 공력이 불탄 사람은 ‘구원탈락’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성경은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저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씀한다.

고린도서신은 근본적으로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미 구원받은 신자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구원받은 이후의 문제’ 즉 ‘상의 문제’ ‘천국의 문제’이다.

새 관점 칭의론의 중요 인물인 톰 라이트는 고전 3장 건축자의 비유를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마지막 심판으로 말하면서 “결국 그들이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어떤 수준에서든 손실을 겪게 되며 ‘오직 불을 통과해서만’(고전3:15)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고 말한 것은 가뭄에 단비와 같은 말이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에클레시아스북스 283쪽)

신자에 대한 심판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의 문제’이다. ‘상의 문제’는 ‘공력의 문제’이며 ‘행위의 문제’이다. 그래서 공력이 불타버린 신자를 지옥에 가는 자로 오해하지 못하도록 성경은 주권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 “누구든지 그 공적이(any man's work) 불타면 해를(loss) 받으리니 그러나(but)  자신은 구원을 받되(himself shall be saved) 불 가운데서(by fire)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건축자의 비유는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의 문제’이고 ‘공력의 문제’이며 ‘천국의 문제’이다. 만일 ‘공력의 문제’를 ‘구원/칭의의 문제’라고 간주해서 끝까지 구원탈락이라고 주장한다면, 필자는 차라리 발람을 꾸짖은 나귀를 설득하는 편을 택하겠다.

‘주여 주여 하는 자’이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쫒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능력을 행한 자’, ‘나를 떠나가라’는 선언을 들은 사람은 공력이 ‘불탄 자’와 같다.

이 비유에서 그들이 지은 신앙의 집은 ‘불에 탔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라는 말씀은 건축자의 비유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못박는다. 이 말씀은 ‘공력의 문제’로서 ‘천국의 가르침’이다. 천국의 문제는 ‘공력의 문제’이며 ‘상의 문제’이고 ‘의의 문제’이다. 천국은 ‘구원/칭의’와 구별된다. 이 놀라운 발견은 필자의 첫 번째 책 ‘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의 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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