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1.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하신 백성에게 조건없이 주신 선물이다(엡 2:8). 믿음의 대상을 바르게 믿고,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한다. 사도신경에서는 기본적인 대상 지식과 기본적인 믿음의 내용을 고백한다. 사도신경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없다. 그것은 326년 니케야 공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이전부터 교회 안에서 고백문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325년 전에는 "사도신경(Credo)과 믿음의 법칙(regula fide)" 두 가지의 믿음 고백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가 결정된 뒤에 공적고백문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고대에 사용했던 ‘믿음의 법칙’ 문장은 찾지 못하고 있다.

서방교회는 공회의가 결정한 공적 문장이 있지만, 공회의 전에 고백하던 믿음고백문장을 반복해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개혁교회에서는 간혹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고백을 고백하기 한다. 보편교회 법적인 공교회 문서를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단이 정교회(The Orthodoxy Church)이다. 서방교회는 교회가 전통적인 한 교회라고 해서 The Holy Catholic Church이다. 칼빈은 이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하나로 만든 The Holy Catholic Church 체계를 구성했다. 칼빈이 형성시킨 교회관은 1세기 교회(고대 교회)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밝히고 계승할 것을 체계화시켰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경에 근거해서 확립시켰고, 믿음을 이루는 과정을 체계화시켰다(그리스도인과 교회 이룸, 기독교강요 3권, 4권) (참고) 1. 니케야 신경이라고 말하면서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문서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325년 니케야 신경의 특징은 '아나떼마(Anathema)'를 마지막에 표기한 유일한 공의회 문서이기 때문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2. 사도신경은 암송(暗誦)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고백(告白)하는 것이다.

2.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 로마 카톨릭(교황주의)는 이 믿음의 내용을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그것은 성인숭배(성자숭배) 사상으로 왜곡시켰다. 우리는 한국 교회 사도신경에서 “음부에 내려가사, go to hell”이 빠졌음을 제시했다. 음부강하(지옥강하)는 성인숭배(성자숭배)와 잘 부합한다. 조상숭배가 강했던 한국 상황에서 들어온 기독교는 죽은자에 대한 행위를 우상숭배로 명백하게 거부하는 의식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죽은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교적인 기독교에서는 슬그머니 죽은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첨가시키고 있다. “죽은자를 위해서 기도”는 면죄부 판매와 동등한 사고다. 1517년 루터가 제시한 95개조 반박문에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죽은자를 위한 기도가 가능한 근거가 중간기 문서에 있기 때문에, 개혁 교회는 2경전(第二經典, Deuterocanon)을 구약성경에서 제외하고 39권을 구약정경으로 확정했다. 교회는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참고) 가족 중에서 불신으로 죽은 자들이 있다. 먼저 간 가족 때문에 교회 믿음을 하지 못하겠다는 착한 분들이 있다. 착한 가족이라면 자기가 있는 지옥에 가족이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눅 16장). 자기 범위 밖에 있는 것은 마음에 두지 않아야 한다.

성자(聖者, saints, ST.)라고 일컫는 교회의 위인들은 죽었다. 죽은자는 산자에게 어떤 행동을 하지 못 한다. 아무리 훌륭한 공덕이 있다고 해도 죽으면 그 자체로 끝이다. 죽은자에게 어떤 느낌을 받으려는 행동은 우상숭배이다. 예루살렘 성묘교회가면 골고다에서 예수의 시체를 누인 장소가 있다. 베들레헴에 태어난 장소도 있다. 그 장소에 손을 대면 어떤 영적 유익이나 육체적 치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인간이 죽어서 어떤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우상숭배이다.

“성도의 교통”은 첫째 성도가 영적과 육적으로 교통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령께서 화합을 이루시고, 육적으로는 구제로 화합과 평등을 이룬다. 성도의 교통은 교회의 교통도 된다.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에서 지원을 받아 사역했다. 성도의 교통이다. 세상이 양극화가 있을 수 있지만, 교회에 양극화가 있는 것은 부당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는 세상의 양극화가 교회 안에서 실현된 것에 대해서 권면했다(고전 11장). 성도의 교통으로 육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영적으로 하나가 되고, 영적으로 하나가 되면 육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약한 자를 위해서 배려하고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돕고 격려한다. 둘째 목사의 설교와 성도의 들음이 교통하는 것이다. 설교를 듣지 못하면 영적 성장과 성숙은 없다.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목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도 이해하지 못한다. ABC가 없이 DEF가 될 수 없다. 중세 로마 교회는 미사 예전으로 은혜를 주려고 했는데, 집례하는 신부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복음도 교황의 교서를 반복하기 때문에 전달자의 지식과 인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맹목적 신앙(implicit faith)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개혁된 교회에서는 맹목적 신앙을 불신앙으로 평가하고 명시적 신앙(explicit faith)을 추구한다. 확실한 신앙을 위해서는 첫째 전달자를 잘 이해해야 한다.

3.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 죄사함(Forgiveness of sins) 고백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가장 특이한 의식이다. 그리스도인은 정당한 죄사함 의식이 있어야 한다. 구원파는 죄사함의 비밀(마음을 믿어 죄를 사함을 깨달음)이라는 독특한 구도로 정통 기독교의 죄사함의 도식(소명에 의해서 죄사함이 시작함)을 왜곡했다. 말일성도는 죄사함을 Remission of sin 으로 해석한다. 기독교는 구원 과정(ordo salutis)에서 인간의 역할이 완전 배제한다. 그런대 반(半, semi)주의자들은 인간의 공로를 교묘하게 끼워 넣거나, 대담하게 인간이 주도하는 구원 과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인간의 어떤 공로를 첨가하지 않는다. 죄사함을 고백할 때에는 오직 은혜(soal gratia)에 고백하며, 피의 은혜와 영원한 구원 경륜 그리고 구원의 확실성(견인)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자연인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발생한다. 그럴 때 마다 믿음의 주(主)이신 예수를 고백하며, 십자가의 피흘리신 구속의 은혜를 바라보며 사함의 확증을 고백한다. 나로는 죄에 함몰될 수 밖에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함이 됨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인이 죄사함이 받았다. 그럼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가 없다면 구원은 바로 침몰될 수 밖에 없는 먼지와 같은 피조물이다. 이중은혜(duplex gratia)이다.

4. “몸이 다시는 것”을 믿는다. 몸의 부활의 부활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영생관이다. 제종교에 사후 이해가 있다. 그러나 몸의 부활은 어느 종교에 없다. 혹 윤회(輪廻), 환생(幻生)이라는 구도가 있다. 환생에서 취하는 몸은 전생(前生)의 의식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전생여행이라는 곡해까지 행한다. 전생과 이생을 연결시키는 구도는 자기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다. 전생의 사랑은 환타지일뿐 전혀 실현될 수 없고, 자기 종교 구도에도 그렇다. 그러한 환타지를 즐겁게 허용하는 것은 자기 거짓을 인정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것 밖에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몸의 부활은 의식이 연속적이다. 몸의 부활은 생애에서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몸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 중 하나가 된다.

몸의 부활은 천국 영생에서 먹음과 즐김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무의도식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행동, 영원한 찬양을 기뻐하는 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찬양을 사모한다고 해도 육체에서는 영원히 찬양할 수 없다. 그러나 몸의 부활에서는 찬양을 영원토록 드림에 끝이 없다. 이 복된 찬양을 이 육체에서 사모한다. 플라톤은 몸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인식의 한계를 탄식한 것이다. 기독교는 인식(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고 찬양한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플라톤주의로 신비주의 전형이고, 이데아(idea)를 관조(contemplation)하는 것을 추구한다. 기독교는 육체를 하나님께 주신 것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한계가 있는 육체를 연단하며 몸의 부활을 사모한다.

5.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영생’은 기독교의 기본 신앙이다. 천국은 황금집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처소이다. 영생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모두 주어진다. 그러나 생(生)이란 무엇인가?를 잘 안다면 천국과 지옥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살아있다고 느끼는 삶의 역동성,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산다. 그리스도인은 현재 호흡을 기뻐해야 한다(시 150편). 이 생의 즐거움이 영원토록 유지된다는 확신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현재 생이 슬프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내세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영생관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장 현세지향적인 것이 강력한 내세지향적인 신앙이다. 자기부정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부정의식을 갖는 것으로 착각한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지만, 자기를 부정하기 때문에 슬픈 인생이 아니다. 영생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삶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정진한다. 그리스도의 자기 부정은 강력한 자기 긍정이다. 죽음과 살림(mortification and vivification)이 함께 있는 것이지, 자기 부정으로 죽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고 주가 살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영생을 바라보고 믿음의 정진을 쉬지 않는다.

6. ‘아멘’으로 마친다. ‘아멘’은 모든 것을 동의한다는 고백이다. 사도신경은 모두가 발언하지 않아도 마지막에 함께 ‘아멘’한다면 그 고백에 효력이 유효하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고백하는 공적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 고백에는 ‘아멘’으로 마쳐야 한다. (참고) ‘아멘’ 마침은 매우 중요한 신적 동의, 서원, 서약이다. 예배에서 ‘아멘’을 쉽게 화답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예배 자세이다. 설교는 쉽게 동의하고 수납하지 않아야 하고, 깊게 생각한 뒤에 ‘아멘’하고, 아멘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의미 없는 아멘”은 예배를 이방인의 소굴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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