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 칭의론, 전통적 칭의론과 새 관점 칭의론의 논쟁점인 ‘칭의’는 같은 것인가?

송명덕 목사는 총신대학교 및 동 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탄에서 목회중이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칭의론 이해

일반 독자들은 ‘칭의론’이라고 하면 신학자들의 전유물이라고 단정한 나머지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처럼 제쳐놓기 쉽다. 한편으로는 맞지만 잘못된 관념이기도 하다. ‘칭의’라는 단어가 신학적이고, 어려운 용어임은 맞지만 의미상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칭의’와 ‘구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은 이 주제가 어려운 주제가 아니고, 매우 친숙하고 가까운 주제라는 ‘비밀 아닌 비밀’을 알려드린다.

‘전통적인 칭의론’이 말하는 ‘칭의’와 ‘새 관점 칭의론’이 말하는 ‘칭의’는 동일한 개념인가? 물론 양대 칭의론은 모두 ‘문자적으로’ 동일한 ‘칭의’를 언급한다. 그래서 양대 칭의론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시계소리가 ‘째깍 째깍’이 아니라 ‘착각, 착각’으로 들리는 지도 모르겠다.

만일 양대 칭의론자들이 논쟁하는 ‘칭의론’이라는 명칭이 명실상부하게 ‘내용적’으로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라면 ‘논쟁의 시작’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은 100m 달리기에 참가한 두 선수로 비유하자면 동일선 상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유사하게 보이는 다른 주제’라면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양대 칭의론자들이라는 100m 달리기 선수들이 각자 다른 위치에서 출발하는 격의 주장이라면 문제가 있다. 필자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속담처럼 이 부분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다음은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의 “칭의 논쟁, 칭의 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새 물결플러스)에 실린 글로서, 칭의론 논쟁의 상황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16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바울의 칭의 개념이 복음의 진수를 구성한다는 것을 포착했다. 오늘날의 많은 개혁파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루터파와 마찬가지로 칭의 교리를 ‘복음의 심장’, 즉 ‘교회의 존폐를 좌우하는 조항’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칭의가 복음의 중심임을 수호하기 위해 강력한 주장을 개진한 수많은 개혁파 복음주의자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전통적인 개혁파의 칭의 개념에 대한 도전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칭의 논쟁은 최근 들어 더욱 격렬해졌다고 할 수 있다.”(마이클 호튼의 ‘칭의 논쟁’ 1장 칭의 개념의 역사 중에서)

“모든 종교개혁자는 하나같이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오직 믿음을 통해 ‘외부에서 온 의’(alien righteousness)의 선물 안에 있는 사법적 판결이라고 결론짓는다. 칼뱅은 칭의를 ‘기독교의 주요 조항’이자 ‘종교가 의존하는 주요 원리’이며 ‘모든 구원 교리의 주된 조항이자 모든 종교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멜란히톤(Melanchthon)과 칼뱅은 이 공통된 복음적 관점을 조금씩 개선해가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의는 ‘죄 사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된다’는 사실 안에 있다. 이러한 복음적 해석을 따르면, 칭의는 죄로 가득한 상태에서 의로운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이 아니다. 신자들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죄의 지배가 없어졌지만, 죄는 여전히 신자 안에 거한다. 결과적으로 신자들이 하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그 의에 언제나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마이클 호튼의 ‘칭의 논쟁’ 3장 전통적 개혁파 중에서)

(1) 전통적 칭의론과 칭의의 개념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일어난 종교개혁은 ‘이신칭의’로 대변된다. 루터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세웠고, 당시 개혁교회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채택한 것을 통해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➀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칭의

역사적으로 루터파 교회의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 가운데 1530년 필립 멜란히톤이 작성했고, 마틴 루터가 승인했으며 독일 개신교인들이 1530년 찰스 5세에게 헌정한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 (Augsburger Konfession)이다. 제 4조 ‘의롭다 함을 얻음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인간의 업적과 공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가능하고 우리의 죄를 죽음으로서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➁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나타난 칭의

개혁교회의 신조 가운데 가장 고전적이고 대중적인 고백이 1563년 작성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다. 칼뱅주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문답식으로 작성된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더불어 개신교에서 영향력 있는 신앙고백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음 60문으로부터 62문은 ‘칭의에 대한 것’이다.

문 60.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있습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범하였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죄로 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고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가치한 나를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치 내가 죄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순종하신 것을 내가 순종한 것처럼 대하시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의와 성결을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마음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것뿐입니다.

문61. 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있다고 말합니까?

답 :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내 믿음에서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와 성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문62. 왜 선행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왜 선행은 의로워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답 :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완전하며 여전히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➂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칭의’

전통적 칭의론의 기초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 제 11장은 ‘칭의’에 대하여 정의한다. 지면상 1항만 인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롬8:30, 3:24) 이 칭의(稱義)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➃ 최갑종 교수의 칭의론

다음은 백석대 최갑종 교수가 코람데오닷컴에 기고한 “구원/칭의론 다시 생각하기”라는 글로서, 전통적인 구원의 개념을 보여준다. (필자 주: 제목에서도 ‘구원/칭의론’ 이라고 표기한 것처럼 칭의와 구원이 동전의 양면같이 일맥상통한 개념이라는 의미)

“전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한번 구원 받은 자는 어떤 경우에서든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후 심판을 거쳐 영원한 구원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필자 주 : 윗글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전통적인 구원의 관념에 대한 정의이고, 둘째 ‘생각하여 왔습니다.’ 라는 문구에 내포된 뉘앙스를 통해서 무엇인가 저자가 제안하고 싶은 내용이 있음을 암시한다. 필자는 이 문제를 후에 다룰 것이다.)

“칭의”(Justification)란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그의 과거의 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기’ 때문에 ‘죄 사함’과 동시에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따라서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의 의” (Righteousness by faith)라고 부른다. 이것은 법정적인 용어이다. 이전에는 죄인의 신분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에 따른 후속 조치로서 ‘칭의’ 즉 “너는 이제는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2) 새 관점 칭의론 : 톰 라이트

톰 라이트는 그의 책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의 제4장 ‘칭의; 여러 정의의 난제들’에서 본장의 내용인 ‘칭의의 문제’를 다뤘다. ‘칭의’(디카이오시스)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었는데 반하여, 훨씬 더 많이 사용한 단어가 ‘의’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영어에서 의를 가리키는 단어로 서로 다른 어근을 가진 ‘just’ ‘righteous’ 두 가지가 있음을 언급했다. 필자가 쉽게 설명하자면 ‘just’를 어근으로 하는 ‘칭의’(Justfication)와 ‘righteous’를 어근으로 하는 ‘의’(righteousness)가 있다. 양 단어는 비슷한 뜻을 갖고 있지만 어근이 다르듯이, 서로 다른 의미이다. 헬라어에는 ‘디카이오스’ 히브리어에는 ‘체데카’라는 단어가 있다. 로마 가톨릭 소속의 번역자나 주석자들 중 일부는 ‘의’를 ‘정의’로 대체했지만, 이와 관련된 전반적인 문제들을 그다지 경감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디카이오쉬네’와 그 동일어근의 단어들을 사용할 때 히브리어 단어가 함축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사용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법정이라는 맥락 속에서 ‘의’를 거론한다. 법정이라는 맥락에서의 ‘의’는 법정이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 그가 지니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법정에서의 의’는 ‘그들이 가지게 될 것으로 추정되는 도덕적인 특징’ 혹은 ‘그들이 행동으로 증명했고, 그들에게 그 판결을 가져다준 도덕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즉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의 ‘디카이오오’(dikaioo)라는 단어의 의미는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는 행위’가 아닌 ‘누군가에게 어떤 상태를 부여하는 선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칭의’라는 행위에 의해 변화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상태’이지 ‘인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142-1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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