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0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엡4:1-6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어제부터 유치부 성경학교를 필두로 본격적으로 교육부의 여름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치부 아이들이 선생님들의 말씀에 따라 예쁘게 예배와 찬송을 드리고 일정을 소화해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렇게 개구쟁이인 아이들을 적절하게 어우르면서 이끌어 가는 유치부 선생님들의 수고와 재능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아마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의 수준으로 자기를 낮추어 아이들처럼 이야기 하고 아이들처럼 생각하고 아이들처럼 표현하면서 그들과 하나 되는 것은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수준으로 낮추어도 천방지축인 아이들이 제어되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선생님 말을 잘 듣는 아이를 불러내서 사탕과 상을 주더라고요. 선생님 말을 잘 들으면 사탕이 생긴다는 것을 보게 해서 천방지축을 사탕으로 제어하는 것이죠.

이게 어른들이 보기에는 유치한 방법이지만 유치부 아이들에게는 진리입니다. 유치부 아닙니까? 그래서 어제는 유치부 애들을 데리고 무엇인가를 하려면 꼭 사탕이 있어야 하고 과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정말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문제는 커서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 수준이 똑같이 유치부 수준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만약 어른들을 모아놓고 수련회를 하는데 말 잘 듣는 사람 앞으로 나오게 해서 사탕을 하나씩 나누어준다면 어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뭐 이렇게 유치한 곳이 있어.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유치부 아이로 보는 거야. 뭐야...” 다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 어린아이들을 사탕으로 통제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고 안 들으면 벌을 받는다는 그런 원리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어릴 때만 적용되는 원리이지 결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나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 특별히 에베소서가 설명하는 신앙의 핵심은 그 원리와 그 법칙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우리가 잘 하면 상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 원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법칙에 따르면 구원 얻을 인생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을 수 있을 정도의 행위와 선행과 순종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전부 벌 받아 마땅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라는 열매가 맺힌 것은 우리에게 구원 얻을 만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보시고 그의 아들을 나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엡1:3-4절이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얼마만큼 잘하고 상 받을 만한 짓을 했는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불순종하여 타락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택함의 복으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죄인 된 나를 택하신 원인과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잘하면 상 받고 못하면 벌 받는 원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 법칙과 그 원리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물론 어릴 때는 우리가 그 사랑을 모르고 이해를 못해서 그 법칙으로 잠시 우리를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커가면서 이 사랑을 깨닫고 잘하는 상, 못하면 벌의 법칙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의 어떤 원리와 법칙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초대받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상으로 걸맞게 점도 없이 흠도 없이 거룩하게 빚어져가고 만들어져가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부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성자 안에서 택하셨고 성자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속량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위력과 지혜와 능력을 동원해서 택한 자들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어 믿음을 가지게 만들고 그 거룩한 사랑 안으로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그의 백성들에게 적용시켜 나가기 위해 이 땅에 세워진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같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같은 주로 믿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 하나 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을 엡4:4-6절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유치부 아이들처럼 아직 어리고 수준이 유치해서 하나님의 이런 신령하고 거룩한 계획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해도 이미 성령께서는 이런 믿음과 이런 부르심으로 모든 믿는 자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 이 위대한 하늘의 진리를 배우고 성령께서 이런 믿음과 이런 몸으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으로 힘써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교회에 은사를 주셨고 직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꾸 이 믿음을 허물고 다른 믿음으로 왜곡시키고 다른 부르심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사탄은 성령께서 믿게 하신 이 하나의 믿음을 공격합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잘하면 복, 못하면 벌이라는 법칙 안으로 몰아넣어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사랑 앞에 우리의 삶을 세우지 못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겸손과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길들여져서 따라가는 온유로 힘써 우리를 몰아가며 성령께서 부르신 거룩한 소망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에 동의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잘하면 상 받고 못하면 벌 받는 식의 법칙으로 안 됩니다. 어떤 순간 어떤 자리에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 법칙을 뛰어넘는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법칙이 아닙니다. 법칙으로  설명이 안 되는 그 무엇입니다.

요즘 우리가 욥기를 묵상하는데 욥기 1-2장에서 사탄이 도전하고 공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꾸 욥의 신앙을 법칙으로 제시하고 법칙 때문에 믿는 신앙이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고 울타리를 지켜주시고 재산을 주시고 자식을 주시고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 없이 왜 욥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경외하겠습니까? 라고 도전합니다. 하나님은 감히 이 사탄의 도전을 받아들이셔서 욥에게 사탄이 주는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의도하는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고 사단이 제시하는 모든 법칙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욥기의 대부분은 욥과 세 친구의 논쟁으로 구성됩니다. 그 긴 내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욥의 세 친구들은 끊임없이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욥의 고난을 해석해서 공격합니다. 네가 이렇게 어려움에 처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냥 당하는 것이 아니다. 죄 없이 망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너도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것이니까 쓸데없이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지 말고 빨리 죄를 회개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해질 것이다. 거의 전부가 이 원리와 법칙 안에서 욥을 바라봅니다. 여기에 대한 욥의 반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 법칙을 모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 원리로 다른 사람들을 충고하고 가르치고 했지만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은 그 원리로 설명이 안 되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욥과 세 친구들이 알고 있는 모든 법칙과 원리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잘하면 상 받고 못하면 벌 받는 원리, 그 원리로 시작했다면 기독교 신앙은 아예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출발인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내가 잘해서 내가 상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못해서 내가 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못했습니다. 나는 불순종했습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벌 받아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나대신 벌을 받았습니다. 내가 심판 당해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심판을 당했고 저주를 당했습니다. 나아가 내가 잘 한 것이 없는데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이라는 상을 내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잘하면 상, 못하면 벌, 그 원리와 그 법칙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의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의 신앙이 유지됩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의 믿음이 완성되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십자가로 시작해서 법칙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의 공격에는 이 은혜가 없습니다. 모두 잘하면 상, 못하면 벌이라는 인과응보의 법칙 밖에 없습니다.

욥기는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섭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욥의 현실은 이 세상 그 어떤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설명이 안 되는 고난이고 이 세상의 그 어떤 지혜와 전통으로도 이해가 안 되는 고난입니다. 의로운 자가 당하는 까닭 없는 고난입니다. 그 법칙과 그 원리를 뛰어넘고 인간의 모든 경험과 지혜와 전통을 초월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욥의 고난에는 이 세상의 법칙과 원리를 뛰어넘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 대신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 담겨 있고 욥기는 그 사랑 안으로 저와 여러분을 초대하는 믿음의 초대장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 되게 하신 믿음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도 그렇게 법칙과 원리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신 은혜의 주입니다. 우리를 이런 믿음으로 이끄시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신 성령의 역사도 이 세상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이것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기 위한 믿음이고 세례이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삼위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하시고 부르신 존재로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와 묶여 이 신비롭고 위대한 사랑의 여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지체는 아직 사탕이 필요하고 회초리가 필요한 어린 지체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지체는 성숙한 자들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을 배우면서 성령께서 주신 이 믿음과 이 부르심을 힘써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법칙과 원리로도 설명이 안 되는 이 가슴 벅찬 사랑의 초대 앞에 모두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반응하며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은사를 주셨고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 거룩한 경주에 한 명도 낙오 없이 잘 달려가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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