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대 칭의론의 ‘칭의’의 개념에 대한 필자의 관점

저자 송명덕 목사는 오직 한 길만을 간 목사이다. 총신대학교와 총신대 학 신학대학원과 총신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화성 동탄의 제자비전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톰 라이트가 뛰어난 통찰력으로 ‘칭의’와 ‘의’가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필자의 첫 번째 책 ‘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의 핵심내용은 ‘칭의’와 ‘의’의 차이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칭의’와 ‘천국’의 차이를 구별했다.

시대를 전환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이신 칭의’의 발견이다. 이것은 이전에 없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중세 시대를 거치며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은 것이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한 걸음 나가는 위대한 발견이 있다면 무엇인가? ‘칭의와 의’의 차이를 발견한 것이다.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르톨로메오 디아스(Bartholomew Dias, 1450~1500)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끝자락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발견한 위대한 사건과 같다. 이 놀라운 발견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항로가 열리고 인도로 가는 항로와 귀중한 향료 무역로가 열리게 되었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칭의와 의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칭의론 논쟁 가운데 있고, 신앙적으로는 인생의 참된 목표를 잃어 혼돈 가운데 있는 이 시대 성도들에게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 될 것이다.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는 같은 단어인가?]

사람은 ‘비슷한 것은 같은 것이다’라는 관념을 갖기 쉽다. 특히 성경을 대하는 신자들도 그런 것 같다. ‘지식’(knowledge)과‘지혜’(wisdom)는 비슷한 의미이지만, 비슷하다고 해서 똑같은 의미는 아니다. 양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가?

지식은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이며, 지혜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이다. 

‘지식’은 교육을 통해서 습득한다. 세상에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지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삶 속에서 체득되는 것이고, 지식과 또 다른 영역의 산물이다.

독자들에게 ‘평범하지만 차원이 있는’ 질문을 하겠다. 산행을 하다가 뜻 밖에 ‘금덩어리’와 ‘다이아몬드 덩어리’를 발견했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줍겠는가? 혹시 ‘금덩어리’와 ‘다이아몬드 덩어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른다. 필자는 고민하지 않고 ‘금덩어리’와 ‘다이아몬드 덩어리’ 모두를 줍겠다. 독자들도 필자와 같기를 바란다.

비유하자면 지식은 ‘금 덩어리’와 같고, 지혜는 ‘다이아몬드 덩어리’와 같다. 지식이 있는 사람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지식도 있으면서 지혜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고, 사도 바울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주님은 우리들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겠는가?

(1)칭의(Justification)와 의(your righteousness)는 같은 의미인가?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가 비슷한 뜻이기 때문에 같은 단어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이 명백히 다른 단어인 것처럼, 칭의(Justification)와 의(righteousness)도 그러하다. 한편으로 양자는 비슷한 ‘모양’과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동일한 단어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어근을 가졌고,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
 
  ‘Justification’(칭의)의 어근은 ‘just’이고, ‘righteousness’(의)의 어근은 ‘righteous’이다. 만일 영어의 의미가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와 다르다면 거론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로도 확연히 나타난다. 칭의(Justification)는 헬라어 ‘디카이오오’(dikaioo)로서 ‘누군가에게 어떤 상태를 부여하는 선언’이다. 필자는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칭의란 죄로 말미암아 정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대신하여 정죄 받고 형벌을 받아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을 믿으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따라서 의롭게 되었다는 법정적인 선언이다.”

의(righteousness)와 대비해서 주의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톰 라이트가 지적한 것처럼 칭의는 ‘어떤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갖고 있던 죄의 문제에 대한 법정적 선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칭의가 ‘법정적인 선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칭의가 어떤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런 면에서 톰 라이트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에 반하여 의(righteousness)는 어떤 의미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용례를 살펴보자. 천국의 헌장이라 불리는 산상수훈에 ‘의’(righteousness)가  많이 언급되었다. 다음은 ‘천국’과 ‘의의 관계’를 언급한 대표적인 말씀이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your righteousness)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Pharisees)보다 더 낫지 못하면(unless... surpasses) 결코(certainly)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your righteousness)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the righteousness)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필자가 볼 때 양대 칭의론은 ‘칭의’와 ‘의’를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양자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기 때문에  톰 라이트가 전통적 칭의론이 말하는 ‘칭의’와 자신이 관점을 둔 ‘의’가 동일한 의미가 아님을 구별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구원탈락’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 원인은 톰 라이트도 문제의 기저가 되는 무천년설의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구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자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탈락하는 것을 ‘구원에서의 탈락’으로 간주했다. 이렇게 본 원인은 무엇인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았느냐?” 즉 ‘의의 문제’에 대한 것인데, 모든 불신자들의 심판인 ‘백 보좌 심판’에 신자를 포함시킨데다가  ‘칭의의 관점’에서 보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새 관점 칭의론이 주장하는 ‘구원탈락’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유보적 칭의론’로 귀결됐다. 전통적인 칭의론은 화들짝 놀라며 성경이 말하는 ‘칭의의 불변성’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탈락’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칭의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거짓신자’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필자가 볼 때 양대 칭의론이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양대 칭의론 모두 성경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새 관점 칭의론은 ‘구원탈락’처럼 보이는 부분을 발견했고, 전통적 칭의론이 붙든 ‘칭의의 불변성’은 성경이 지지하기 때문이다. 둘째 양대 칭의론이 모두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적용을 했다. 새 관점 칭의론의 경우 ‘구원탈락’이 아니라 ‘상급탈락’이다. (필자 주: 지금 시점에서는 미흡하나마 이렇게 표현한다) 전통적 칭의론의 경우 ‘거짓 신자’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이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뛰어난 의’가 없었기 때문에 ‘상급의 탈락’ ‘천국의 탈락’이다. 이것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왕 노릇하실 때에 왕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보는 관점은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전통적 칭의론과 같이 결코 유보되지 않고 즉시 효력이 발생하며 또한 그것은 ‘영원히 변치않는다. 그러므로 신자의 ‘구원탈락’이란 없다. 그래서 전통적 칭의론은 신앙의 중요한 기초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신자의 ‘칭의’ 자체가 ‘문제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다.

새 관점 칭의론의 특징은 ‘심판에서의 탈락’이라는 문제를 인식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심판에서의 탈락’을 ‘칭의의 상실’로 간주하여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과 ‘유보적 칭의’라는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대한 관점의 ‘부족에서 기인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최후의 심판에서의 주요한 관점은 ‘죄의 문제’와 관련 있는 칭의가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 즉 ‘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이 성경의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하고 부주의한 판단이다. 필자는 이것이 하나의 ‘원칙’이라 생각한다. 전통적 칭의론이나 새 관점 칭의론은 모두 성경의 지지를 받는 ‘든든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양대 학파의 논쟁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부족한 부분’과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 가지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양대 학파 모두 ‘전혀 보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원칙’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 이러한 ‘우리들의 실제’를 인식하는 것은 유익하다. 

다시 본론인 ‘의’(righteousness)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산상수훈에서 언급된 ‘너희 의’(your righteousness)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the righteousness)는 칭의 (Justification)와 같은 의미인가? 매우 단순한 질문 같아 보이지만 매우 중요하고 깊은 질문이라는 것을 감지한 독자는 ‘영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의’(your righteousness)와 ‘칭의’(Justification)는 우리말로도 다르고 영어로도 다르다. 물론 헬라어 원어에서도 다르다. 이것이 다른 단어라는 것은 사전을 찾아보면 확인된다. 만일 ‘righteousness’라는 단어를 찾고 ‘Justification’의 의미를 기대했다면 세계 최고의 로비스트를 동원해서 웹스터 사전을 ‘일흔 번씩 일곱 번’ 개정할지라도 ‘원하는 의미’를 찾을 가능성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 원시림의 나무들이 천둥 번개를 맞아 잘게 쪼개지고 또 쪼개져서 아마존 강 상류로부터 하류로 흘러가면서 부딪쳐 길고 매끈하게 갈아져서 ‘고기조각만 쫓아다니는 별스런 개(dog)’인 ‘이쑤시개’ 200여 개가 똑같은 길이와 굵기로 만들어져 한 통 안에 쏙 들어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가능하겠는가? 수학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불가능’ 즉 ‘미션 임파서블’이다.

태양계 밖의 첫 번째 항성이 4.2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프록시마 켄타우리(Proxima Centauri)이다. 참고로 프록시마 ‘Proxima’라는 단어는 ‘가장 가까운’이라는 뜻이다. 태양계의 가장 가까운 항성에 초당 17Km의 ‘무시무시한’ 우주선의 속도로 7.5만년이 걸릴지라도 이쑤시개 한 통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가장 간단한 도구인 이쑤시개조차도 그것을 ‘고안하고’ ‘만든 사람’이 있기에 존재한다. 어떤 것도 우연히 존재할 수 없다. 사실 우리들은 이런 ‘놀라운 사실들’을 알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원더맨’ or '원더우먼’이다.

양대 칭의론이 ‘칭의와 의’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양자를 비슷하게 보게 하는 공통분모인 ‘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의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보캐브러리 5000’을 떼지 못한 사람이든지, 어제 밤 ‘긴 밤 지새우고’ 풀잎 마다 이슬이 내리고 해가 중천에 떴어도 ‘참깨인’ 사람이 아니라 ‘들깨인’ 사람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삼대 차려’가 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고, 서양에서는 “A loaf of bread is better than the song of many birds.”이라 한다. 그러므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한 ‘밥상 차려’가 있다. 둘째는 학교나 운동선수 등 각종 단체의 협동과 일치를 위한 ‘전체 차려’이다. 셋째 동서양,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육상, 해상, 공중전 어디서든지 새겨들어야 할 ‘정신 차려’(Come back to earth)가 있다. ‘삼대 차려’ 가운데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 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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