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주목하면 우리 안에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 에너지가 주어진다

최원영 목사. 본푸른교회담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본국제신학교학장, 본헤럴드발행인. 등

저서: 주기도문연구,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충성된일꾼되어가기

불안한 시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심지가 견고해야 한다”(사26:3,4). 주님은 심지가 견고한 자를 지켜주신다. 평강으로 지켜주신다. 이것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요 처방전이다. 누가 심지가 견고한가?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분들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해야 하는가?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신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불안과 염려와과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이다.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면, 심지가 견고해진다. 심지가 견고해야 끝까지 인내하고 승리할 수 있다.

평강의 반대 개념으로 기독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면 염려나 불안일 것이다. 염려란 무엇인가? 헬라어 원어는 ‘분열’이다. ‘마음이 나누어 어수선한 상태를 말한다,’ 마음을 지치게 하고, 힘을 빼며, 스스로 괴롭히는 염려는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염려는 우리에게 평안을 빼앗아 가버린다. 우리 마음에 염려가 자리를 잡게 되면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의 노예가 된다. 염려는 곧 마음의 분열이다. 다시 말해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두 마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염려, 불안, 공포, 두려움 다 한 나무요 한 뿌리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1-34).

이 말씀의 핵심은 장래일에 대해서 조심성 있게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염려는 우리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염려는 두 마음이다. 분열된 마음으로는 고난을 뚫고 나갈 수 없다. 마음을 견고하게 가지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고정하라.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일 것이다.

아합왕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열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분열된 마음은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주목하고 그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고 따라가야할 열방의 표본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고귀한 거룩한 사명을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땅에 3년 동안 가뭄 심판을 주셨다. 아합왕은 가뭄의 원인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있다고 누명을 씌웠다.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갈멜산 영적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말한다. 여호와와 바알 중 진짜 신을 선택하라고 했지만 백성들은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거리고 만다(왕상18:21). 백성들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선택할 것인지, 바알을 하나님으로 선택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도 바알도 선택을 못하는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을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선택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두마음, 염려와 분열된 마음으로는 우리는 가보지 못한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 한결같은 마음, 견고한 마음을 주님께 고정시켜야 험한 미래를 뚫고 나갈 수 있다.

두 마음으로 구원의 성, 새예루살렘인 천성에 들어갈 수 없다. 구원의 성은 오직 한 마음으로만, 들어가는 문이다. 심지가 견고하다는 것은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이땅에서 사는 동안 완전한 평화를 선물로 주신다.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신뢰하면 마음에 평강을 주시는데 이 평강은 내적인 평강과 외적으로 안전하게 보호해주신다는 확약인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신뢰하지 아니하면 마음이 견고하지 못해 늘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의 노예로 살게된다.

교회에 김00 집사가 있다. 과거에는 항상 문제앞에서 늘 극단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고 가정을 힘들게 했다. 그런데 최근 과거와 다르게 마음에 평안함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보다 삶의 더 팍팍한데, 오히려 마음에 평안과 여유가 있다. 매일 성경을 필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 대선지서를 쓰고 있다. 그런데 정성을 다해 성경을 쓰고 있다. 말씀을 쓰면서 자신의 마음이 정결해지고, 마음이 편해지고, 어수선했던 마음이 정돈되었다고 한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마음에 평안과 위로와 힘을 주님이 주신다고 한다.

우리 시대를 혼란함이라고 정의를 내려도 무관하다. 국가도, 교회도, 일터도, 가정도, 개인의 삶도 혼란함으로 뒤엉켜있다. 어떻게 이 혼란함이 정리될 수 있을까? 문제는 항상 간단하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를 항상 어렵게 풀어갈려고 한다. 주님께 집중해보라. 주님을 주목하면 우리 안에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 에너지가 주어진다.

또한,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믿음이란 불신앙을 극복하는 처방전이다. 불신앙이 자라면 가라지 신앙인이 된다. 가라지는 쭉쟁이 신앙인이다. 쭉쟁이는 늘 불안과 불만과 염려와 불평과 근심이 자란다. 내 안에 불신앙의 가라지가 자라지 못하도록 주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주목해야 한다. 주님을 신뢰하면 믿음이 자란다. 그 결과 내적 외적인 평안이 회복된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는 에너지를 받는다.

누가 예배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드릴까? 철저하게 주님을 신뢰하는 분들이다. 예배에 불성실한 사람은 하늘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히 공급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목회자들과 중직자들은 예배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제가 목회자 그룹 설교에서 반성하는 의미로 한마디 했다.

“철야예배에 사람이 없다고 기도하기를 포기하거나 예배를 포기하는 사람은 목회를 포기하고 다른 일들을 하십시오. 사람이 많으면 예배하고, 사람이 적으면 예배에 불성실하다면 목회자가 되지 마십시오. 바울사도가 이런 부류를 향해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목회자와 중직자들은 공 예배에 자신의 삶을 드려야 한다. 여기서부터 헌신과 순종을 시작하라. 이것이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것이다.

분주함, 염려, 불안, 두려움, 어수선함, 불확실이란 단어가 내 마음을 채워져 간다면, 곧 질식해 죽어가는 것이다. 이 죽음과 어둠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오직 하나이다.

믿음의 상상력을 키워라. 주님을 붙들라, 주님께 집중하라, 주님을 주목하라. 이것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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