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비가일(אֲבִגָ֑יִל, Abigail)

(4) 아비가일(אֲבִגָ֑יִל, Abigail)

 

김에스더 목사 - The Second Life Foundation 대표, 뉴욕퀸즈교회 담임, 뉴욕사모합창단 및 미주여성목회자합창단 지휘

들을 귀(지혜로운 마음)가 있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나발(Nabal)의 아내 아비가일(Abigail)이 나온다. 나발은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매우 부자였으나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미련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다’(삼상 25:3)라고 설명한다. 즉 이 부부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대조시키고 있으며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의 언행을 보여준다.

이 부부가 등장하는 시기는 사무엘이 죽고 아직 사울왕은 살아있었지만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다윗이 왕권을 차지하기만 하면 되는 때였다. 그래서 다윗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왕의 편에 설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지만,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왕의 처분에 따라 생사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무엇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왕으로 세우신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나발은 양의 털을 깎는 축제(음식이 풍부한 축제)를 열었다. 그 동안 다윗은 나발의 목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들을 보내어 자기가 그 동안 나발의 목자들을 지켜주었듯이, 다윗의 사람들을 위하여 먹을 것을 나누어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서 요구했다. 다윗은 "...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라며 자신을 나발의 아들의 위치로 낮추었다.

그러나 완악하고 미련한 나발은 이제 왕이 될 일만 남은 다윗에게 예의를 갖추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무례하게 그의 미련함을 드러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기름부으신 다윗을 향해 왕에게 반역하는 종이라고 욕할 뿐만이 아니라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라며 다윗의 신분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라며 그의 부모까지 두루두루 욕을 했던 것이다. 그는 들을 귀가 없었다.

결국 다윗은 4백명을 이끌고 나발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러 갔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지혜로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속히 음식을 장만해서 다윗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지혜로운 말과 부지런한 행동으로 인하여 그녀는 현재와 미래의 남편 두 사람을 모두 살렸던 것이다.

들을 귀가 없었던 나발과 반대로 아비가일은 들을 귀가 있었다.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은 겸손한 자세를 의미한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하셨을 때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솔로몬은 백성들을 재판할 때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understanding heart)을 달라고 했다. 여기에서 '지혜로운'이라고 쓰인 히브리어 '소메아'(שֹׁמֵ֙עַ֙)는 '이해하다(understand 창 42:23)', '듣다(hear 출 32:18, 삼상 3:9, listen 시 81:13)', '순종하다(obey 신 21:18, 20)', '증인(witness 삿 11:10)'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께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받은 솔로몬은 수많은 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 들으므로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분별력을 얻게 되었다.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말을 못하도록 막거나 마음을 닫아버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실 때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계시록에서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라며 '들을 수 있는 귀'를 강조하셨다. 

나발에 대하여 그의 종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인은 불량한(불경건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삼상 25:17). 나발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말해서 그는 불경건한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로 남의 말을 듣지 않아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교만하고 불경건한 남편과는 반대로 누구든 문제를 갖고 달려와서 이야기를 털어놓는,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아내 아비가일이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겠는가? 

들을 귀 즉 상대방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가 없는 무정한 남편, 남의 말은 무조건 무시해버리며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고 돈을 움켜쥐고 사는 불경건한 남편, 그래서 대화가 되지않는 남편과 살아온 아비가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항상 자기 감정에 충실한 남편이 홧김에 또는 충동적으로 뱉은 말들과 저지른 일들을 뒷감당하느라 무진 애를 쓰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종들이 남편의 말을 할 때에, 한 마디만 들어도 남편이 어떻게 다윗의 사람들을 다루었을지 훤히 그림이 그려졌을 것이다.

사무엘상 25장 3절에서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다’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에서 '총명'이라는 히브리어 쉐켈(שֶׂ֙כֶל֙)은 '이해심, 명철(understanding, 스 8:18)', '감각(the sense, 느 8:8)', '지혜(wisdom, 대상 22:12)', '사려 분별(prudence, 대하 2:12)', '지각(discretion, 잠 19:11)' 등의 뜻이 있다. 즉 아비가일은 불경건하므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미련한 남편과는 반대로 명철하고 지각이 있어서 분별력이 있고 슬기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너무나 외관상 어울리지 않는 부부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아비가일은 그러한 남편과 살고있는 동안은 남편과 한 몸이므로 일을 저지르고 '나 몰라라' 하는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해 뒷감당을 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며 화평케 하는 아내


남의 말을 듣지않는 교만하고 지각이 없는 남편으로 인해 온 가문이 몰락하기 직전, 그러한 남편과 온 집안을 살리기 위하여 아비가일은 남편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은밀히 준비했다. 이것이 진정한 여성의 복종이다. 들을 귀와 영적 분별력이 없는 남편에게 가장이라고 무조건 물어보고 그 말에 따르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종이 아니다. 가장인 아나니아의 말을 따랐던 삽비라는 남편과 함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상황에서 남편이 도움이 되는지 또는 방해가 되는지 사리 분별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물질을 사랑하는 남편은 우상숭배자이므로 그런 남편을 둔 여성들은 아비가일처럼 남편이 모르게 은밀히 해야할 일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일들인지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고, 남편 몰래 뒷주머니를 차서 엉뚱한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명철한 아비가일은 남편과 온 집안을 살리기 위하여 민첩하게 모든 것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윗 앞에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가서 분노한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보자마자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었다. 얼굴을 땅에 대었다는 것은 지극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뿐만아니라 다윗 앞에 엎드려서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말했다. 자기 남편의 죄악을 자기에게로 돌리라고 했던 것이다. 

다툼이 왜 일어나는가? 서로 자기가 옳다며 낮아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다윗이 달려온 것은, 나발에게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서 정중하게 부탁을 했는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몰상식하고 몰인정한 불량한 나발의 언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노한 다윗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그의 상처입은 감정을 회복시켜주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먼저 다윗이 원했던 음식을 넘치도록 준비했고, 대접을 받지 못하여 화가 난 다윗을 보자마자 급히 나귀에서 내려서 최대한으로 그를 경외한다는 표현을 했던 것이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왕으로 기름부으러 갔을 때에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제외한 모든 아들을 사무엘 앞에 선보였다. 사무엘이 또 아들이 없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다윗을 불러왔고, 불레셋과의 전쟁에 나갔던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줄 때에도 형들이 그에게 빈정거리던 것만 보아도, 그는 부모와 형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며 외롭게 홀로 들에서 양을 치며 곰과 사자와 싸우며 살았던 불행한 과거를 엿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장인인 사울왕은 끊임없이 그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었다.

가장 사랑받아야 할 가족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살아온 다윗은 매우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기 때문에 그를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말을 들으면, 나발의 말을 듣고 대노한 것처럼 분노가 치밀어올랐을 것이다. 단지 그는 그러한 자신의 분노를 기도와 찬양으로 승화시켰고,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얻은 군중 속의 외로움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신의 아픔을 건드린 상황에서 그를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아비가일은 남편의 허물을 자기에게 돌리라고 한 뒤에, 자기가 가져온 예물을 다윗과 함께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즉 그녀는 다윗이 분노한 대상을 나발로부터 아비가일에게로 전환시켰다. 아름답고 지혜롭고 겸손한 그녀를 보며 다윗은 그녀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의 죄를 자기에게로 돌리라는 여인의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그녀의 지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쯤되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비가일의 뛰어난 지혜이다. 이제 다윗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다음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다윗을 칭찬한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현대의 여성들 중에 남편의 죄악을 자기의 죄악처럼 자기가 담당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칙인 '부부는 한 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셨던 평화의 왕이시며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적 분별력으로 냉철하고 담대하게 권면할 줄 아는 리더십을 가진 여인


리더십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난다. 리더십이 있는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출해낸다. 그러나 리더십이 없는 사람은 상황을 판단하기 보다는 쉽게 낙심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거나, 심하면 걱정과 두려움 속에 더 깊이 침몰해 들어가 스스로 거짓말을 만들어 망상에 사로잡힌 채, 주위의 모든 이들을 탓하며 위기의 상황을 절망의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리더십을 테스트하려면, 위기 상황까지 몰고 가보면 금방 드러난다.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그 집에 배설하고 대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삼상 25:36-38).

크리스천의 리더십은 섬기며 베푸는 리더십이다. 그리고 말해야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 즉 때를 분별하여 입을 열며, 해야할 말은 두려워하지 않고 한다. 아비가일은 남편이 자기 기분에 취해있는 동안은 침묵하고 있다가, 적당한 때에 그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를 말해주었다. 그녀는 또한 다윗에게 가서는 다윗 앞에 풍부한 음식을 드리고 최대한 겸손한 모습으로 다윗의 마음을 열게 한 뒤에 최선을 다하여 다윗을 설득했다. 그녀가 한 말은 자신의 지혜가 아닌 성경에 기초한 말씀이므로 다윗도 이미 알고있는 것이어서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5:26).

"보수(vengeance and recompence)는 내 것이라"(신 32:35)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인간은 절대로 복수를 하면 안 된다. 복수를 하는 그 순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복수를 하지 못하도록 아비가일을 통하여 막아주셨던 것이다.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아비가일이 언급한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 속에는 다윗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며 다윗을 해하려는 자는 사울왕을 포함하여 모두가 나발처럼 다윗이 친히 죽일 필요없이 하나님께서 처단하시기를 원한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자격지심으로 무척 마음이 상한 다윗에게,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모든 원수들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는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상한 심령을 위로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혜로운 그녀의 권면은 다윗을 감동시켜서 복수를 하지 않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있은 뒤 열흘 후에 하나님께서 나발을 데려가시는 것을 보게 하셨다.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리더십까지 갖춘 여인의 겸손하지만 담대한 권면은 다윗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그 다음 장인 26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왕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으나 사울왕에게 손을 대기는 커녕, 사울왕에게 자신을 '벼룩과 같다'라며 최대한 낮추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된다(삼상 26:20).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갖고 권면하는 아비가일에게 순종한 다윗은("피차 복종하라")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삼상 25:39)라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씀하는 여자의 복종은 앞에서 언급했던 하와나 바알 신전에 있던 여사제들처럼 남자 위에 군림하여 가르치거나 선악과를 따서 먹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에 따라 남자를 머리로 생각하면서 브리스길라처럼 성령안에서 모르는 부분을 자세하게 그러나 때로는 아비가일처럼 담대한 믿음과 드보라처럼 어미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남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가르치며  이끌어 주는 것을 말한다.

아내는 그를 "미련한 자", 종들은 그를 "불량한 자라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뒤에서 호칭하는 것조차 모르는 들을 귀가 없이 교만하고 어리석은 남편 나발은 하나님께서 치시므로 죽었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은 피차 복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들을 귀가 있는 다윗을 남편으로 얻게 되었다. 

너무나 연약해 보이지만 어떠한 비바람에도 결코 꺾이지 않는 코스모스처럼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며 부탁했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25:30-31)

아비가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을 남편으로 얻은 것처럼, 다윗 역시 아비가일의 권면과 부탁을 순순히 받아들여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아름답고 지혜롭고 영적 리더십까지 갖춘 아내를 얻는 복을 받았다. 이는 여자의 복종만이 아닌 피차 복종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다윗도 그녀의 권면에 복종하므로 얻은 결과이다. 만약 아비가일이 이처럼 지혜롭지 못했다면, 밧세바의 경우처럼 다윗이 남편 나발을 죽이고 아름다운 아비가일을 아내로 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코스모스처럼 연약한 여성이지만 리더십을 갖춘 용기있는 아비가일이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아무나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한다. 설득력은 리더십을 갖춘 사람에게서 나온다. 왜냐하면 설득을 당한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득력은 수많은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탄생된다. 산전, 수전, 공수전, 우주전까지 겪게 되면 왠만한 이들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되므로 설득력이 강해진다. 그것을 세상사람들은 카리스마 즉 '지도자가 갖고 있는 침범할 수 없는 권위'라고 한다. 이 말은 '은사'를 말하는 헬라어 '카리스마(χάρισμα, 롬 6:23)'에서 나온 것으로 리더십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비가일이 이렇게 담대한 용기와 냉철한 리더십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나발과 같이 자기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교만하고 들을 귀가 없는 몰인정한 사람과 살았기 때문에 그와의 삶 속에서 풀무불 속에서 금이 연단되듯이 훈련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므로 현재 나발과 같은 남편과 살아가면서 고통스럽고 황당한 삶을 살고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고통으로만 보지말고 담대한 리더십을 갖추기 위한 고난의 풀무불이라고 생각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는 가운데, 왕(대통령, 그룹의 회장 등)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는 믿음의 여성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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