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7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에베소서 4장의 초반부는 7가지의 하나 됨을 말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구원자 그리스도가 한 분이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도 한 분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도 하나요, 그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세례도 하나요, 그 믿음을 가지게 하고 그 믿음으로 살면서 자라게 하시는 성령님도 한 분이요, 그렇게 믿는 자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한 교회도 하나요, 교회가 바라보고 가야 하는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통일성을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함으로 힘써 지켜가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할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통일성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성 속의 통일성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원래 오늘 본문 7절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접속사 “데”가 나옵니다. “너희들은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통일성을 힘써 지키라.” 그러나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분량대로 선물을 주셨고 직분도 주셨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이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 됨이라는 말씀입니다. 

북한의 마스게임이나 카드섹션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 교회의 통일성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담임목사가 카리스마를 가지고 교인들을 어떤 시스템 아래서 일사분란하게 통제하고 움직이고 끌어가는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교회일수록 좋은 교회가 아니라 이단에 가까울 확률이 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통일성은 그런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다양한 은사를 선물로 주시고 그 다양한 은사와 차이들을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통해 한 믿음과 한 소망으로 이끌어가는 그런 통일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 사람의 분량대로 은사와 지위와 능력, 재물, 재능, 건강, 지혜, 지식 등 모든 필요한 것을 가장 적당하게 주십니다. 모두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가난한 자도 있고 부자도 있고 많이 배운 자도 있고 적게 배운 자도 함께 있습니다. 건강한 자도 있고 연약한 자도 있으며 유력한 지위를 가진 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구제하는 자도 있고 섬기는 자도 있고 가르치는 자도 있고 노래 잘하는 자도 있고 열심히 잘 먹는 분들도 있습니다. 색깔로 비유하면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깔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그것을 다 하나의 색깔로 묶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양한 색깔을 유지한 체 하나의 목표와 소망을 향하여 조화롭게 묶이는 것입니다. uniformity가 아니라 unity입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중요한 사람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한 믿음과 한 소망으로 묶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선물이 있는데 그것을 교회의 직분이라고 말씀합니다. 11절에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라는 직분을 소개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기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는 초대교회가 세워질 때 주님이 임시적이고 비상하게 사용하신 특별한 직분으로 지금은 없는 직분입니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본 자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며 기적을 행했던 자들이죠. 고전15:8-9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했는데 맨 나중(에스카톤)은 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맨 나중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그 뒤로는 사도로 부른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바울이 끝입니다. 지금도 사도가 있다고 말하는 집단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가 아니라 신약교회를 세울 때 주님이 한시적으로 사용하신 신약의 선지자로 이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돌아다니면서 사도들의 복음을 전했던 순회전도자였습니다. 이것 역시 초대교회 시절,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 복음의 진리가 아직 글로 기록이 되기 전에 하나님이 세우신 비상직분입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초대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신 비상직분으로 지금은 없는 직분입니다.

나중에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고 교회가 안정되어진 후에 주신 직분이 무엇입니까? 목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항존 직입니다. 성경이 완성되고 난 후에 하나님은 사도와 선지자들과 순회전도자들 같은 비상직분이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한 항상 있어야 할 직분인 목사와 교사 같은 가르치는 직분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의 직분, 그리고 말씀의 원리와 기준으로 자비의 사역을 하는 집사의 직분을 통해 교회를 다스려 가십니다. 그 중에도 오늘 본문은 임시적인 직분이든 지속되는 직분이건 전부 가르치는 직분들을 통해 다양한 교회의 지체들이 한 믿음과 한 소망을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교회 가운데 은사와 직분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한 믿음과 한 소망 가운데 자라게 하실 때의 과정이 어떠할까요? 12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온전케 한다는 말은 잠재되어 있거나 죽은 것을 살리고 개발해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직분을 통해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해 죽어 있는 영혼을 살리고 자극시키고 흔들어 깨워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재능과 은사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반응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은사와 직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그 다음 봉사의 일을 하게 합니다. 여기 봉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섬김과 일을 의미합니다. “미니스트리”, 곧 사역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진리의 복음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의 분량대로 주신 선물을 가지고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의 모든 삶은 봉사가 되고 사역이 됩니다.

특별히 8-10절에 바울이 시68편을 인용하면서 은사와 직분이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주신 선물임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시편 68편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그 승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찬송하는 시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인용하면서 은사와 직분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가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시고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주신 선물이라고 적용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로 사단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을 해방시켜 자신의 백성들로 사로잡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주신 은사와 직분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아직도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를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쪽으로 사용되고 발휘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가 우리 각 사람에게 선물의 분량대로 주신 은혜, 곧 나의 재물, 건강, 지식, 재능, 모든 은사는 이렇게 적용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전부이고 건강이 전부이고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로잡혀 있어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십자가와 부활로 해방시키고 주님의 백성들로 사로잡아 오셔서 그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왜 주셨습니까? 우리의 자랑과 안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기 위해서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사용하면서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로잡힌 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어 오며 그리스도가 전부인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여줍니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은 것임을 알고 그 선물을 사용해서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이웃과 교회를 위해 선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집니다. 몸을 세운다는 것은 부러져 있는 뼈를 바로 잡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뼈가 부러진 위골 된 상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타락한 이후 전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삽니다. 다른 이들과 협조나 공조를 하더라도 그게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절대 서로를 돕지 않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입니다. 자기가 부러지면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부러지면 잘라내버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을 건져내셔서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자신을 위해 살게 하지 않고 다른 지체를 위해 살게 합니다. 그것이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몸의 지체가 자기만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입은 귀찮다고 씹기를 거절하고 다리는 힘들다고 걷기를 거절하고 손은 무겁다고 들기를 거절하고 눈은 보기를 거절하고 다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해보십시오. 그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전한 몸은 팔이 부러졌을 때 나하고 상관없으니 그냥 잘라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부스를 하고 목이 부러진 팔을 지탱해줍니다. 뼈가 붙을 때까지 지탱해줍니다. 그렇게 해서 몸이 세워집니다. 결국 목이 부러진 팔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목과 팔이 따로이지 않습니다. 한 몸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교회를 통해 말씀을 배우고 들어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다른 지체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집니다.

몸을 움직이는 곳이 어디입니까? 머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각 지체로서 함께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고 그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여야 합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에 주시는 진리의 말씀은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해주고 죄에 대한 힘을 잃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죄와 더불어 진리로 싸우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사와 직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병원이 질병과 싸우지 못하고 환자를 고쳐주지 못하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도 동일합니다. 교회가 만일 죄와 싸우지 못하고 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존재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는 죄와 더불어 싸우신 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셔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은사와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과 선포된 말씀을 통해 진리를 재워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통해 끊임없이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우지 않고 사람들을 죄에서 떠나게 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은사와 직분을 가지고도 자신만을 배불리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죄에 침잠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닙니다.

만약 오늘 우리들에게 은사와 직분을 이렇게 사용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존귀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으며 가장 처절한 환경과 육체적 핸디캡 속에서도 감히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크기와 교인의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은사와 직분을 말씀을 통해 바르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바르게 말씀을 전하고 배워서 그리스도가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바르게 사용하는 온전한 성도로 우리의 삶이 봉사가 되는 사역자들로,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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