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4:13-15, 2014년 8월 10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을 보장해주는 티켓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천국을 보장해주는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마땅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격과 실력으로 연결되지 않고 발휘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믿음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보험도 아니며 기분 좋을 때 한번 덥석 꺼내어 놓는 종교적인 적선이나 만용도 아닙니다. 이것은 말씀을 붙들고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만들어져가는 삶의 나이테와 같은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가는 성화입니다.

지금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해 이 자라남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세우신 교회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어떤 일을 하는 자체가 아니라  모든 일을 통해 한사람 한 사람을 자라게 하는데 있습니다. 어디까지 자라야 합니까? 13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도 아니고 청소년기의 예수님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목동의 일을 하던 다윗의 믿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미디안 광야에서 방황하던 모세의 수준에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올 때 실망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던 아브라함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도 계속 자랐던 사람입니다. 다메섹에서 거꾸러질 때와 1차 전도여행 때가 달랐고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때가 또 달랐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을 향해 죽기를 각오하고 올라갈 때와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서와 에베소서를 쓰고 있는 지금은 또 다릅니다.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감옥 안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하는 실천적 신앙의 첫 번째 내용이 무엇이라고요? 자라는 것입니다. 자라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있기에 이렇게 강조하는 것일까요? 14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자라지 않으면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의 궤술,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라라고 합니다.

자라지 못하면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속아 넘어갑니다. 속임수로 번역된 이 단어는 “퀴베이아”라는 단어인데 주사위라는 뜻인 “퀴보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도박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노름, 술책, 기만” 이런 뜻입니다. 그냥 속임수가 아니라 도박하면서 사용하는 속임수로 간교하고 악랄한 속임수입니다. 사실 도박 자체가 속임수이죠. 사람이 노름으로 인생을 망치는 것은 전부 한판만 따면 인생이 바뀐다는 허망한 생각에 속아서 그런 것 아니던가요? 이번만, 이번만, 딱 한번만 하다가 망할 때까지 가는 것이죠. 화투나 카드, 또 여러 가지 도박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거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생각인데도 불구하고 거기 한번 빠지면 왜 헤어 나오지 못합니까? 일확천금과 요행을 바라는 악랄하고도 무서운 속임수, 궤술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신자로 살아내면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 되게 하는 이 과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힘들고 귀찮고 성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그 과정을 생략한 체 어떤 종교적인 행위나 초월적인 체험을 통해 진리마저도 간단히 얻을 수 있다고 속이면서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키려 합니다. 사십일 금식기도만 하면 영적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누구에게 기도만 받으면 만사가 형통해지고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하고, 교회에 잘 충성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다 이러한 종류의 악랄하고도 간교한 속임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영적도박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넘어갑니까? 이 속임수가 간사한 유혹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속이는 것이 아니라 간사한 유혹으로 포장해서 속입니다. 유혹이란  매력이 있어서 유혹입니다. 한번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간사한 유혹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먹음직하기도 하고 보암직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유혹은 다 그렇게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매력의 끝이 무엇입니까? 간사한 유혹이라는 단어 자체가 “파눌기아”라는 말로 짐승이 먹이를 잡기 위해 기회가 올 때까지 숨어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 유혹은 덫입니다. 이 유혹에 빠지면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 긍정적으로 믿으면 성공한다. 이번 집회에 와서 이 은사만 받으면 만사가 형통할 수 있다. 40일 금식기도만 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히는 것이 다 뚫리게 된다. 우리에게 오면 일주일 만에 진리를 깨닫게 해주겠다. 이런 소리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삶이란 과정을 통해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참된 지식이 없고 성화가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해서 아는 것이 영생인데 그럴 틈이 없습니다. 달콤한 것 같은데 생명이 없습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저것만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따먹고 나니 오히려 비참해졌습니다. 이것이 간사한 유혹입니다. 

여기에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바로 그러합니다. 궤술과 유혹에 약하고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왔다 갔다 하는 것이죠. 어린아이들은 집중력이 약하고 호기심이 강해서 한 자리에서 15분을 앉아있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진리에 관하여 집중력이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합니다만 진리에 관하여는 30-40분을 견뎌 내지를 못합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에게 사탄은 여러 가지 세상의 풍조에 맞춘 교훈에 간사한 유혹으로 옷을 입혀서 속임수로 덫을 놓는데 꾸준히 자신과 싸우고 죄와 싸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그 먼 길을 교묘히 감추고 쉽고 달콤하고 빠른 길들을 제시하죠. 여기에 진리를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덜컥 걸리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영적 수준을 가름해보려면 설교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설교가 좀 딱딱하고 지루해도 그것이 성경의 말씀이면 들으려고 노력하고 들을 줄 압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게 진리를 들으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진리에 사로잡히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교회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진리라도 길고 지루하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반면에 진리가 아니어도 신기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에는 잘 반응합니다. 신기하다. 조금 새롭다. 그러면 진리와 상관없이 그냥 달려갑니다. 요즘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보면 한결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슨 다단계 같다는 것입니다. 다락방, 가정교회, G12, 두 날개, 셀 교회, 알파, 신사도주의, 긍정적 사고방식, 다 그러한 풍조입니다. 성경에는 영적 다단계의 원리가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닌데도 이들은 공공연히 가르칩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진리가 아닌데도 왜 따라 간다고요? 매력적으로 보여서 그렇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버섯들 중에 절대 만지면 안 되는 것들이 있는데 독버섯입니다. 독버섯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칼라를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100% 독버섯입니다.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신앙의 길도 이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보장해주며 쉽고 평탄한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들은 혹시 독버섯이 아닐까? 생각하는 조심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삶의 정황이 어떠합니까? 로맨틱하거나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라 살벌한 전쟁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전쟁 같은 일상 속에서 말씀을 풀어서 우리의 인격에 녹여내어야 하는 숙제입니다.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평생 주님과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정을 생략하고 예수만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논리로 성경의 진리를 단순화 하는 것은 우리를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한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책 중에 삼국지가 있습니다. 후한 말부터 위, 촉, 오나라의 삼국시대를 거쳐 진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에 이르기까지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조조, 동탁 등 수많은 영웅호걸 들이 등장해서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으로 싸우는 것들을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가미해서 다루고 있는데 왜 사람들이 삼국지에 그렇게 열광합니까? 거기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는 자가 영웅이 되고 나라를 차지하는, 그래서 우리의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욕구를 대리 만족시켜주는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황석영 씨는 황석영의 삼국지를 펴낸 뒤 그 후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삼국지를 읽는 맛은 가슴이 썰렁해 지도록 밀려오는 일생의 덧없음과 회한뿐이다” 권모술수와 속임수가 지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이기고 지고 하는 싸움의 스토리가 흥미진진하지만 결국 다 끝나고 나면 모두 덧없는 것이라는 회한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이 이런 삼국지 같은 현실에서 고민도 없고 통증도 없이 그저 예수만 잘 믿으면 승리하고 형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성경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독버섯입니다. 속임수이며 간사한 유혹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북극점 등정에 성공한 최종열 씨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북극점에 도착해서 태극기를 꽂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 북극점에 도달하려고 지난 3년간 그토록 애를 썼던가? 왜 이 성공의 자리에서 나는 허무함과 허탈함에 슬퍼해야 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에 태극기를 꽂는 족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나와 쉴 수 있을 정도의 그늘을 가진 인격과 성품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저는 요즘 욥기를 묵상하면서 폭풍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내 나이 60이 되어 지금 보다 조금 더 나의 지성이 날카로워지고 날카로워진 지성만큼 언어가 정제되고 능히 다른 사람들을 쉬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격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내 기필코 욥기를 주일 낮 설교에 강해하리라고 다짐할 정도로 감동을 먹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내일 본문인 욥27:1-2절입니다. “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욥기가 초대하는 신앙의 세계가 여기까지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알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잘 하면 상주시고 못하면 벌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정당하면 복을 주시고 정당하지 못하면 저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지금 욥이 이끌림 받고 있는 믿음은 어디까지입니까?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를 선대하시고 축복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입니다.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시는 전능자입니다. 소름끼치는 말입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임을 신뢰하고 찬송하는 자리까지 욥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자체가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의 지혜로 출발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가장 간절하게 기도한 것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정당하신 분이 가장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토록 정당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혼을 괴롭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정당하신 예수님을 물리치시고 그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지혜 때문에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이 권면을 하고 있는데 그가 감옥에 있는 자체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정당함으로 성립된 것이 아닙니다. 정당함을 뛰어넘은 말도 되지 않는 은혜로 성립되었고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을 찾아왔습니다. 정당함을 가리고 정당함을 지키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정당함을 넘는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 여기까지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정당함의 법칙을 뛰어넘어 은혜의 자리까지 도달하라고 하십니다.

이 자리에 가면 고난 중에 있는 지체에게 쉽게 너 왜 기도 안 해,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데 왜 기도안하고 그러고 앉아 있어? 그런 입 바른 말 대신 진정으로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담아내게 됩니다. 우리도 여기까지 자라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되겠습니까? 인생이라는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하루하루를 살아내셔야 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삼국지 같은 형통과 승리만 보장해주는 기독교 신앙은, 결국 우리에게 허무함과 허탈감만 줄 뿐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흔들리지 마십시오. 요동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 여러분의 이름으로 무슨 족적을 남기려고 하지 마시고 다만 여러분에게 허락된 그 삶의 길이만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이 일에 열심을 내시고 부지런히 자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은혜로 알게 된 하나님 때문에 넉넉해지십시오. 비록 출발은 어린아이로 출발할지라도 주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을 하나로 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그늘 밑에 기대고 묻기 위하여 찾아드는 인격과 성품의 어른들이 되어 주십시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도 그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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