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은 사회적으로 파산당한 도망자들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발행인, 서울신학대학교Th.D, (재)본월드미션 이사, (사)새길과 새일 부이사장, 등. 저서: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주기도문연구 등

불안이란 단어는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언어중에 하나일것이다. 불안을 극복할 종교적 대안은 무엇일까?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는 오직 믿음의 상상력을 키우는 것뿐이다. 이 기초위에 불안의 안개를 걷어내고 내일의 희망을 가꾸는 것이다.

주후 300년경 옥시린코스란 작은 도시, 지금 이집트 땅이고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통치지역이었다. 어떤 남자가 신의 뜻을 물으려 종이에 질문을 적어 왔다.

“내가 보조금을 받게 될까요? 내가 선한일을 하게 될까요? 내가 돈을 받게 될까요? 내 재산들이 경매장에서 팔리게 될까요? 내가 팔리게 될까요? 내가 걸인이 될까요? 내가 도망가야만 하는 일이 일어날까요? 나의 도망이 끝이 있을까요? 내가 시의원이 될까요? 내가 내 아내와 이혼하게 될까요? 내가 독살을 당할까요?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게 될까요?(미셀 끌레브노<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한국신학연구소, 258면), 지형은 109면 재인용.

지형은목사는 위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석의 다리를 놓았다. 갈대 속껍질로 만든 당시의 종이 파피루스에 쓰인 질문이 잡다하다. 분명한 것은 불안으로 가득한 섬뜩한 분위기이다. 이 남자가 산더미처럼 짊어지고 있는 불안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삶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주후 3세기에서 4세기로 넘어가는 로마제국의 사회문제였을까? 역사적으로 그 시대를 재구성해보면, 사회경제적인 불안이고, 정치 군사적인 불안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전성기를 지나 기우러져 가고 있었다. 국경에서는 이민족의 침입이 다반사였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부적으로 경제구조가 무너져 가는 것이다. 파산당하는 가정이 늘고,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 노예로 팔려가는 것보다 사막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기독교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경제적 사회적 파산 상황에서 당시의 정신세계를 이끌던 기독교 신앙에서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안식처가 탄생된 것이다.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사회 경제적인 의미는 ‘사회적으로 파산당한 도망자들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힘이 싹텄던 것이다(지형은 110쪽 재인용).

우리 시대도 불안하다. 먹고 사는 문제는 항상 사회와 연관되어 있기에 오늘날 심리적 불안은 최고의 스트레스이다. 사람들은 자유 평등 인권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원한다. 그런데 지구촌에는 양질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다.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나라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선두 국가가 될 것이다. 젊은이들의 관심사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양질의 일자리에 목말라한다. 양질의 일자리만 준다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이다. 모든 정부가 모두가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를 채워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짐 클리프턴 [일자리 탄생] 보고서에 의하면 70억 인구 중에서 30억명이 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양질의 일자리는 12억개 정도에 불과하다. 양질의 일자리는18개 정도 부족한 셈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사랑도, 돈도, 음식도, 안식처도, 평화도, 자유도 아니다. 세계인들이 원하는 것은 양질의 일자리이다. 향후 30년간 세계의 리더가 누가 될것인가? 결국에는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제공하는 나라가 리더로 부상할것이다.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으로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이동할것이다. 좋은 일자리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매출 500억 이상 회사가 6000개 정도 밖에없다. 또한 세계 1위 수출품목에서 한국은 약 60개 정도이고, 중국은 1600개 정도된다고 한다. 수치를 보면 한국의 미래가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또한 일본의 젊은이들은 회사를 골라서 선택을 하는 기업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 위주의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건강한 중소기업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다. 교회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매년 일자리는 줄어가고 있다. 대형교회와 작은교회의 임금의 차이는 더벌어지고 있다. 양질의 좋은 목회지가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문제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해법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산업의 구조, 교회의 구조가 그리 쉽게 변화를 회복하기에는 넘어야할 산들이 너무 많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존재한다. 이 벽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참으로 답답하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 일자리를 박탈당한분들에게 엄습한 불안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의 역할이 중요함을 직시하게 된다.

교회가 왜 중요한가? 기독교가 왜 중요한가? 예수님이 왜 중요한가? 믿음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지형은 목사는 그의 책 [라티오]에서 “교회가 경제적인 구제, 마음의 위로, 정신사적인 방향을 제시하든 모든 것을 다 포함하여 사람들이 견디어 내도록 영혼에 상상력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불안한 시대를 넘어서는 힘은 희망의 상상력이다. 인류역사에서 종교가 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할 일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세상에서 지쳐서 힘들어 낙망하고 넘어져서 피난처를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교회는 피난처가 되어주어야 한다. 평안을 잃어버리고 칼날위에 불안하게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믿음의 길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고난을 견딜수있도록 그들의 마음에 믿음의 상상력을 심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고난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항상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믿음의 자극을 주었다. 믿음만 있으면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믿음으로 상상하며 한고비 한고비 뛰어넘었다.

히11장을 보면. 이스라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일부이다. 역사에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훈장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다” 돌로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히브리기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 된 것을 받지는 못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믿음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는 것뿐이다. 믿음은 작은 겨자씨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된다. 우리의 작은 겨자씨를 믿음으로 키워가면 큰 나무로 자라게 된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는 믿음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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