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사랑으로 섬기게 하신 주님

절기상 대한이 지나고 입춘이 다가 올 이 맘 때부터 농부들은 본격적인 농사를 앞두고 볍씨를 준비한다. 그리고 볍씨 준비가 마쳐지면 농부들은 볍씨를 소독한 후 모판에 옮겨 정성스럽게 벼들을 키우게 된다. 그 벼들이 자라 넓은 들판에 옮겨져 광활한 들녘에 황금물결을 이루는 것이다.

미얀마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쓰여 지고 있는 이명재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 실로암교회(기성, 경기도 부천)를 찾아갔을 때 받은 첫 번째 느낌은 ‘이 곳은 복음의 황금들판 미얀마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복음의 모판이다’는 생각이었다.

미얀마는 한반도 전체 크기의 3배에 해당하는 68만 ㎢로서 동남아 대륙 국가 중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는 UN이 밝히는 동남아 최빈국이지만 동남아 여러 국가들 중에서 발전 잠재력이 가장 높은 국가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불교 국가인 미얀마는 국민의 87.9%가 불교도이며, 기독교인은 6.2%에 불과하고 오픈 도어즈 월드 와치 리스트 (Open Doors’ World Watch List) 에 따르면 미얀마는 기독교 박해지수 28위로 매우 높은 등급에 올라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입국해 산업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미얀마 외국인 근로자들은 약 2만 명이다. 이들은 언어 및 기후와 문화 환경이 다른 한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접한 일터가 우리나라의 민낯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향한 긍휼과 섬김의 마음을 이명재 목사에게 주신 것이다.

실로암교회(기성, 경기 부천) 이명재 담임목사

“명재야, 내가 하지 못한 일, 네가 계속 이어가주렴”

대전 목원대학교 영문과를 다니던 중에 쪽방촌에 공부방을 열어 소외된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던 우영란 전도사님의 삶은 방황하며 거칠던 이명재 목사에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39살 너무도 이른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영란 전도사님은 마지막 유언과 같은 부탁을 이명재 목사에게 전하고 세상을 떠났다. “명재야, 내가 하지 못한 일, 이 섬김의 일을 네가 계속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마지막 부탁은 제자들에게 복음의 사명을 부탁하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의 명령처럼 이 목사의 마음에 굳은 소망이 되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서울에 있는 괜찮은 직장에 취업을 하게 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었다. 결국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대학원을 준비했다. 대학원을 준비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일하는 중에 어느 날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은 결과 결핵을 진단 받았다. ‘결핵이 너무 깊이 퍼졌다’는 의사의 말에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는 절망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강원도 평창의 한 작은 기도원을 찾았다. 우사를 고쳐 만든 작고 초라한 기도원 구석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다. 매일 한 움큼의 약을 입 안 가득 쏟아 넣어도 나아질 기색이 없던 기침이 어느 날 잦아들었다. 마침 결핵약을 타러 평창의 보건소를 찾았을 때 그는 검사를 통해 결핵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 심한 결핵을 이렇게 일찍 치료하신 하나님에게 어떤 뜻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고 산골에서 내려 온 그는 다시 대학원 준비를 이어갔다.

 

늦깎이 신학생과 외국인 목사의 만남

결핵 치료에 힘쓰느라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MA (목회전문과정)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 필기시험을 마치고 면접을 보았지만, 도저히 그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없었다. 면접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무거운 마음에 되돌아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음 날 그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을 무작정 찾아가 면접관이었던 주임 교수님의 방문을 두들겼다. “교수님, 어제 면접에 대답을 다 못했지만, 저는 정말 신학을 하고 싶고 또 해야 합니다” 당당하기까지 한 그의 결의에 찬 모습에 교수님이 학생처에 다녀오시더니만 합격을 보장해 줄 테니 열심히 하라는 확답을 했다. 그렇게 늦깎이 93학번 신대원 생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명재 목사는 신대원 시절 점심시간 마다 충정로에 있는 교회에서 매일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부천역 부근의 길을 걷다가 낯선 외국인이 와서 길을 물었다. 40대 초반의 체구도 작고 얼굴은 까무잡잡한 외국인에게 친절히 길을 알려주고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 헤어졌는데, 얼마 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외국인은 미얀마에서 목회를 하다가 더 깊이 있는 신학공부를 위해 미얀마에서 한국에 온 ‘쿱리안 파우’ 목사님이었다. 그 뜻밖의 만남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명재 목사의 미래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인이었다. 학교와 멀리 떨어진 부천의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외국인을 수많은 신학대학원 중에서 같은 신학대학원에서 다시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에 이명재 목사는 파우 목사님을 매주 토요일 마다 부천의 신혼집까지 초대해서 함께 식사도 나누며 주일에는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주말을 보냈다. 그 따스함이 전해진 것일까? 어느 날 파우 목사님이 조심스레 말은 건넸다. “Mr. Lee, 나와 어디를 좀 같이 갑시다.” 그와 함께 간 그곳은 이명재 목사의 운명에 전환점과 같은 곳이 되었다.

 

“사랑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이야”

파우 목사님을 따라 간 곳은 김포공항 뒤편의 동양동 외진 곳이었다. 파우 목사님은 이 목사 부부를 어떤 컨테이너 창고로 안내했다. 그 문을 여니 파우 목사님 같은 작은 체구의 외국인 노동자가 얇은 천 하나를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추운 겨울의 냉기가 뼛속까지 밀려드는데, 그 외국인은 난방도 안되는 차가운 쇠바닥에 누워있던 것이다. 가슴까지 에일 듯한 그 모습에 집으로 돌아온 이명재 목사 부부의 마음이 아파왔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사의 아내에게 선한 마음을 주셨다. “여보, 그럼 우리가 파카라도 사드리는 게 어때요?” 한 주간 아내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파카와 간식을 준비한 이명재 목사 부부는 다시 그들을 찾았다. 뜻밖에 이 목사 부부의 호의를 입은 그 외국인은 연신 고마움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시작으로 매주 먹거리와 파카를 사서 그곳을 방문하게 하셨다. 처음에는 한 명 두 명 시작된 만남이 금세 10명이 넘는 모임이 되었다. 그들과의 교제는 자연스레 예배로 이어졌다.

더 이상 좁은 공간에서 한계를 느낄 즈음에 부천에서 한의원을 운영하시는 김인수 장로님(당시 집사님)의 호의로 한의원의 한쪽 공간을 모임의 장소로 쓰게 됐다. 추운 겨울 따스한 곳으로 사람이 모이듯 미얀마 근로자들은 입소문을 통해 하나 둘 늘어나 30명이나 될 만큼 예배 모임이 커졌다. 그렇게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그들을 섬겨갔다.

실로암교회 예배당

평안한 목회 임지를 포기하고 미얀마 형제들 곁에 서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을 다닐 즈음 성결교의 지적이면서도 성령 충만한 영성에 이끌려 다시 서울신학대학원으로 학업의 자리를 옮긴 이명재 목사는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시흥의 한 교회에서 파트타임 전도사로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담당했던 부서가 큰 부흥을 이루었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그를 불렀다. “아니! 이 전도사 도대체 매일 어디를 그렇게 가는 거예요? 교회 14주년 창립기념 개척교회를 신도시에 세울 건데, 이 전도사가 가게 될 거예요.” 졸업하자마자 준비된 교회건물과 성도들이 있는 상태로 담임 목회를 할 수 있는 엄청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 함께 한 미얀마의 형제들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1994년, 결국 그 좋은 제안을 포기하고 아무런 보장도 없는 미얀마 형제들 40명과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한의원 한쪽 공간을 빌려 모이는 것에 한계가 왔고, 은사인 서울신대 조갑진 교수님의 소개로 중앙성결교회 이만신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부천 소사에 25평 남짓한 지하 전세를 얻었다. 그것이 오늘날 ‘실로암교회’의 첫 출발이 된 것이다.

교회를 개척 할 무렵인 94년, 96년에 두 아이 까지 낳아 키우게 된 이 목사 부부에게 하나님은 그 현실을 기쁘게 이겨낼 힘을 주셨다. 평일에는 미얀마 형제들이 일하는 공장을 찾아가 그들을 심방하며 위로했다. 낯선 땅에서 맞는 생일이면 외롭지 않도록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위로했다. 폭설로 도저히 차도 움직이지 못하던 한 겨울의 눈밭을 헤쳐 깜짝 생일 축하를 해 주었을 때의 그 감동을 그들은 잊지 못한다. 이 목사 부부는 이것이 바로 목회이고 그것이 교회라고 믿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 의 말씀처럼 교회는 Giving church(주는 교회)이고 그들을 향해 Going church(가는 교회)가 그들의 목회관이었다. 언제까지 주고, 언제까지 찾아갈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감동될 때까지다. 그래서 이명재 목사는 당장의 결과나 당장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들을 만날 때에도 급하게 복음을 꺼내지 않았다. 그들이 복음을 느끼고 구하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로암교회 예배당 입구 선교 게시판

복음의 황금들판 미얀마를 준비하는 실로암교회

미얀마 형제들이 주말에 교회 올 때만큼은 햇빛이 드는 안락한 공간에 머물게 하고 싶은 마음에 98년에 첫 쉼터를 마련했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얼마 후 하나님은 실로암교회를 위한 중보기도자인 김동순 집사님을 통해 마포에 사는 최윤선 성도님을 만나게 해 주셨고, 그 분을 통해 방이 3개이고 화장실이 2개인 쉼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따스한 햇살 가득한 ‘햇빛 쉼터’ 하지만 얼마 후 전세값이 올라 마음조리고 있을 때, 한동엽 장로님을 통해 다시 그 햇빛 쉼터를 지킬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미얀마 형제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국 미얀마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된 것이다. 실로암교회는 복음의 황금들판을 이룰 미얀마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모판과 같은 곳이었다. 그 복음의 작은 모들이 미얀마로 돌아가 놀라운 성장을 이루고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암교회에서 예수를 만난 미얀마 근로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미얀마에 자신들이 직접 교회를 세우게 된다. 미얀마는 기독교에 대한 통제가 심해 외국인이 교회를 세우거나 전도활동 하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자국민이 교회를 세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고국으로 돌아간 미얀마 형제들이 그들이 예배드릴 곳을 찾아 헤맸지만 마땅한 처소를 발견하지 못하자, 스스로 돈을 마련해 교회를 지었다. 그렇게 양곤 지역에 대나무로 지어진 양곤 실로암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2008년 사이클론으로 미얀마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때 대나무 교회도 사이클론에 날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일어서게 역사해 주셨다. 미얀마에 현지 양곤 실로암교회 미얀마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1천만 원의 헌금을 모았고, 제재월 장로님을 통해 4천만 원, 그리고 실로암교회 성도님들과 동역자들의 합력으로 다시 200평의 콘크리트 건물로 된 교회를 짓도록 이끄신 것이다. 현재 양곤실로암교회는 약 120여명의 미얀마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더 나아가 양곤의 빈민가 흘라잉따야에 지교회와 유치원을 세워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얀마 곳곳에 복음의 싹들이 자라 열매를 맺고 있다. 이 목사는 고국으로 돌아간 미얀마 근로자 성도들과 SNS를 통해서 계속적인 교감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로암교회 성도들과 함께 1년에 한차례씩 선교지를 살핀다. 그곳에 갈 때마다 해가 다르게 달라진 모습을 확인한다.

어떤 사역자는 한국에서 근로자로 있을 때 이명재 목사를 통해 예수를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게 되었다. 그는 미얀마 제2의 수도인 만델리에서 교육 사업을 펼치고 있는 피터 집사이다. 이명재 목사가 베드로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새롭게 불러준 이름이다. 피터 집사는 미얀마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을 운영하다가 그 아이들이 졸업하자 초등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고 있다. 그 학교는 자연스럽게 고위관리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수준 있는 학교가 되었다. 복음도 자연스럽게 그들속에 스며든 것이다.

데이빗 집사(개명)도 마찬가지로 외국인 근로자로 한국에 왔다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명재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술에 찌들다시피 힘겹게 일하다가 예수를 영접한 어느 날 이명재 목사와 함께 안양의 갈멜산 기도원에 가서 한국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에 도전을 받아 고국인 미얀마에 돌아가 3만 명의 대지를 구입하고 기도의 집을 세웠다. 그의 꿈은 미얀마 땅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의 전초기지가 될 기도원을 운영하는 것이다.

삐안 집사는 만델레이에 치즈공장을 세웠다. 그는 치즈 공장을 통해 얻어진 수입을 복음선교를 위해 쓰기로 작정을 하고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토마스 집사는 유치원을 10개 세우는 것이 꿈이다. 벌써 그는 3곳의 유치원을 세웠다. 특히 2곳은 빈민가에 세워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에 외국인 근로자로 왔다가 이명재 목사를 만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들이 지금 미얀마 복음의 대부흥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명재 목사는 단순히 복음만을 그들에게 전하지 않는다. 복음은 삶의 변혁을 일으킨다는 것을 믿고 미얀마를 변화시킬 리더로 세우기 위해 미얀마 노동자 성도들을 끊임없이 훈련시키고 있다. 국내 크리스챤 CEO들을 초청해서 그들의 성공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의 고급문화를 체험하게 해서 발전될 고국 미얀마를 꿈꾸게 했다. 고국으로 돌아가 믿음의 본을 보인 선배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서 현재 한국의 미얀마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며 도전을 갖게 했다.

실로암교회 1층에 자리잡은 미얀마 마트, 메리 집사가 섬긴다.

이명재 목사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명재 목사의 간곡한 부탁이 마음에 계속 남았다. “목사님,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저를 드러내지 말고 하나님만 드러나게 해 주세요” 3층 나지막한 상가 건물에 자리 잡은 실로암교회. 처음에는 도심지 작은 개척교회 같았지만 돌아오며 다시 본 그 교회는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 미얀마를 위해 준비하신 복음의 모판이었다.

실로암교회 1층에 자리잡은 카페, 수익금은 미얀마 트레샤고아원(릴리전도사)의 후원금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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