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다니엘서 주석을 읽으며 진행하는 주일설교(2)

다니엘서의 유익: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릴 인내를 제공함

다니엘서는 특이하게 유대인이 등장하지 않고 이방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이방 지역에서 선지자 활동을 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뒤를 이어 다니엘이 사역했다. 그 뒤에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유대 지역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유대인 중에 다니엘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사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지자로서 지위에 대해서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칼빈은 유대인들이 배은망덕하지 않았다면 선지자로서 은사가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라고 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널리 존경받았음을 1-6장에서 나타난다. 7장부터는 나오는 환상은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7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뒤에 귀환했지만 풍요로운 생활이 아니라 고난의 세월을 지내야 했다.

칼빈은 70년이 아닌 490년 동안 지연시켰다고 제시했다. 7배나 지연시킨 것은 영혼이 완전히 실의에 빠질 정도였다. 하나님께서 바사에서 귀환시켰는데 여전히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절망에 빠졌다. 다니엘은 그 고난의 기간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밝히심으로 믿고 인내할 수 있도록 했다. 다니엘의 계시는 그 고난의 기간에서 믿음으로 인내한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예언이 된다.

칼빈은 다니엘이 자신의 생각이 아닌 성령의 지시로 기록했다고 제시했다. 인간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지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멸망, 알렉산더의 등장(BC 4세기)과 후계자들의 구도를 어떻게 예언할 수 있겠는가? 주전 2세기 다니엘서가 기록되었다면 예언이 아닌 역사 현상을 조합한 것이 된다. 주전 6세기 다니엘이 기록했다고 한다면 성령의 지시로 기록했음이 명백하다. 다니엘은 성령의 도구, 이해가 아닌 계시를 명료하게 드러내려고 했다.

다니엘이 선지자 권위가 있다는 것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 느부갓네살의 첫째 꿈과 둘째 꿈 해석에서 정복자의 꿈을 해석하는 권위를 볼 수 있다. 정복자인 느부갓네살이 치욕적인 예언을 귀하게 경청했다. 칼빈은 이러한 진술이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고서 할 수 없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둘째 부분(7장)부터는 하나님의 섭리로 교회를 돌봄으로 제시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대상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유대인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자이시고, 자기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키신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전이 짓밟히는 동안 정복자들을 향해서 대적하는 마음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율법을 변개시켰다. 칼빈은 이러한 다니엘과 중간기의 유대 상황을 지금과 대조시켰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진 교회를 버리고 생존에만 노력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탈취도 결국 안전한 생존 때문에 즐거워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어둠의 시대에도 주의 백성은 탁월하게 보존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 백성을 잃지 않은 것이다. 칼빈은 7장과 9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도래할 연수를 계산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백성들이 얼마나 불경스러울지도 예측했다. 70년 귀환 뒤에 백성들은 성전을 짓지도 않아 선지자들의 각별한 독려로 성전을 건축했다. 그 성전이 지어진 뒤에서 스스로 실망까지 했다. 성전에 성벽을 건축하러 바사에 있던 느헤미야가 와서 시행해야 할 정도로 불충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오랫동안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는 사악한 자들이 정당한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세로부터 하나님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심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참된 구속자(true Redeemer)를 보내셔서 죄를 정죄하고 회복할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알리려 하셨는데, 어떤 탁월한 수학자도 해독할 수 없다.

다니엘 선지자는 교회가 당할 다양한 재난을 예언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유대인들은 율법을 변개해서 전통을 만들었고,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신자에게 믿음을 제공하셔서 그림자로서 율법(몽학선생)의 기능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제사로 죄를 폐기하고, 영원한 의를 제공할 것을 예언했다(And when he predicts the Death of Christ, he shows for what purpose he should undergo death, namely, to abolish Sin by his sacrifice, and to bring in Eternal Righteousness).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지만 평온하지 않을 것임을 예언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승리까지 승리의 열매를 기대하지 않도록 권면했다.

다니엘서의 유익은 끊임없는 인내와 한 승리를 향한 정진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의 인내와 정진에 부가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마지막 날까지 전파하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한 쌍처럼 느껴진다.

(칼빈 다니엘 주석 1강) 다니엘 1:1-3.

1. 유다 왕 여호야김 3년은 BC 605년이다. 이 때 첫 포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첫 포로에 포함되었다. BC 605년는 갈그미스 전투(Carchemish)가 발생했고, 바벨론이 앗수르와 애굽의 군대를 격파해서 중동 지역을 평정한 해이다. BC 609년에 요시아 왕이 앗수르를 지원하는 애굽 군대를 므깃도에서 저지함으로(왕하23:29) 바벨론이 승리할 수 있었다. 요시아 왕이 므깃도에서 바로느고를 저지한 것은 계시에 의한 것이다. 요시아 왕의 전투는 가장 슬픈 전투였다. 자기 백성을 칠 제국을 돕는 전투에 임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주의 뜻을 이룸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앗수르는 사라지고 바벨론 제국이 등장했다. 세계 최강국 앗수르가 멸망한 이유는 북이스라엘을 정복했기 때문이고, 가장 빨리 멸망된 제국인 바벨론도 유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죄는 피할 수 없다.

2. 칼빈은 느부갓네살(1절)을 느부갓네살의 아들로 해석했다. “여호야김의 3 년”에 느부갓네살이 아버지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왔다. 칼빈은 자기 해석이 합리적이고 요세푸스가 여호야김 8년에 일어났다고 해석한 것에 대해서 다니엘서를 읽어보지 않았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요세푸스가 성경에 무지했다고 주장했다. 요세푸스처럼 무식한 것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하나였다. 참고로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 갈 때 예루살렘에는 예레미야, 에스겔이 있었다. 예레미야의 묵시를 무시해서 당한 고초였다. 칼빈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간 사람을 더 부러워했을 것에 대해서, 절대 그렇지 않음을 제시했다. 이것은 칼빈의 실존이 드러난다. 프랑스에서 고통받은 그리스도인이 제네바 혹은 해외로 피신한 위그노들이 평안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달랠 의인 세 사람에 다니엘을 포함시켰다(겔 14:14, 노아, 다니엘, 욥).

3.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공성전(攻城戰)을 전개했다(1절). 공성전의 기본은 성을 고립시키고 보급을 차단시키며 압박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도성인 예루살렘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는 것은 불경한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불경한 백성을 심판하는데 경건한 백성들도 포함되어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경건한 백성들은 여호와나 민족에 대한 불만이 없고, 충성과 사랑에 변함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낙망함이 없는 것이다. 주의 자녀가 낙망하지 않을 것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전유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소유하셨다. 그래서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다. 왕과 방백 그리고 백성들이 범죄한 유대와 예루살렘에 대한 징벌의 수레가 멈추지 않음을 다니엘은 알았다. 예레미야의 묵시를 들은 자녀들은 여호와의 징계의 때에 징계를 기쁘게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졌다. 그래서 더욱 더 경건하게 서야 할 사명을 느꼈다.

4.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전에 있는 성전 기물을 전리품으로 획득해서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 보물 창고에 저장했다(2절). 정복자의 발에 밟히지 않을 것은 없다. 고대 전쟁은 신의 전쟁이기 때문에, 전리품으로 획득한 타국의 신전의 기물들은 정복자의 신전 창고의 전리품이 되었다. 바벨론의 신전은 마르둑을 기본으로 하는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이었다. 이방인 정복자는 신을 수집 품목으로 생각했다. 자기들이 정복해서 소유한 신을 소집해서 만신전을 만들며 기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에는 기물만이 있고 신상은 없었다. 그것은 이방의 어떤 신전과 달랐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전을 훼파하며 성전기물을 취했지만, 어떤 신상(神像)을 취하지 못했다.

5. 느부갓네살은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포로는 정복자의 위용이었고 정복지 관리 정책의 일환이다. 아스부나스라는 환관장이 소년들을 양육할 사람이었다. 포로 양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요세푸스가 다니엘과 포로들을 환관이 되었다고 한 것을 거부했다. 환관은 왕과 긴밀한 존재이고 통지 지역을 관할하기까지 한 긴밀한 직책이라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각 처에서 정복한 왕족과 귀족들 몇 사람을 선출해서 자기에게 보이라고 명령했다. 칼빈은 왕족과 귀족들은 정복된 지역의 인재들로 제시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위용을 자랑하려고 포로들을 훈련시켜 선을 보려고 했다.

6. 전능하신 하나님, 옛 백성에 대한 놀라운 섭리와 심판을 거울처럼 우리 앞에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장중과 보호에 있음을 확실하게 믿게 하옵소서. 우리는 무슨일을 닥쳐도 주의 보호하심을 바라나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셔 잃지 않음을 믿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소유로 맡기셨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아무리 치열하고 혼란하다 할지라도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옵소서. 우리는 주의 피의 대속으로 천국 안식까지 도착할 것을 원하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