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요한계시록은 우리 시대의 핫이슈이다. 이필찬 교수는 “이필찬요한계시록연구소”를 개설할 정도로 시대에 긴박한 상태이다. 이필찬 교수는 과격한 세대주의와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대한 비판 연구 저술, <백투예루살렘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와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해석 해부하기(동영상 강의)>을 집필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많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그레고리 비일(Gregory K. Beale)의 방대한 요한계시록 주해가 나왔음에도 연구 진행을 완화시키지 못했다. 참고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검색으로 교보문고는 563건, 알라딘은 436건, 예스24는 315건이 나왔다. 황원하 목사(대구 산성교회)는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를 기대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한국 연구자들은 이필찬, 송영목(고신대)이 있다.

송영목 교수는 요한계시록을 부분적-과거주의(Partial Preterism)로 해석하며, 성경은 역사적-문법적 방법(historical-grammatical method)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1974년에 <역사적-비평적 방법의 종말>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1990년 <성경해석학>을 출판했다. <성경해석학>은 송다니엘과 장해경이 번역하여 영음사에서 2014년에 출판했다. 마이어는 비평학의 종말을 선언하고, 비평학을 거부하고 계시에 근거한 신학적 해석학을 제시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변호하는 일이다. 칼빈은 중세 로마 교회의 맹목적 신앙 체계를 성경 주해와 설교로 깨뜨렸다. 그런데 유럽에서 중세 로마의 교권주의에 대한 이성적 항거가 시대정신을 장악했고, 결국 이성주의에 교회 신학도 함락되었다. 성경주해도 합리적 이해 방식으로 추구했고, 이해 가능하고 토론 가능한 문장으로 구성했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맹목적 신앙과 함께 이성적 신앙에 대한 변호적 성경 주해를 확립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해석에서는 맹목적 신비주의까지 첨가되어 매우 혼란이 증폭되는 분야이다. 그래서 좀 더 명료한 이해를 갖도록 돕는 요한계시록 연구가 시급하게 필요하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구자의 전제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모든 연구자들은 연구전에 전제를 갖고 들어가고, 연구 후에 전제를 확인하거나 수정한 전제를 갖는다. 그 전제는 한 문장으로 제시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한 문장으로 제시하지 못하거나 않는 연구자의 연구물은 참고할 필요가 없다. 혼란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할만 할 뿐이다. 자기 전제를 확립하거나 수정시킬 연구자를 만나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잠 27:17). 연구자의 전제를 파악한다면 그 연구자가 어떻게 전제에 맞게 진행하는지를 파악하면 요한계시록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연구에서 ‘전제’, ‘전체를 요약한 핵심 문장’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요한계시록 연구에서는 전제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해석할 수 없다”가 1번 명제로 제안한다. 모든 성경 본문은 해석할 수 없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해석할 수 없음을 명제로 세우는 것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 확정적 해석으로 교회를 공략하며 파괴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확정적 해석을 제안하는 자를 경계하고 거부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제안하며 시작한다.

2. 요한계시록: ‘혼란을 주는 정경’인가? ‘유익을 주는 정경’인가?

신약성경 정경 목록은 아타나시우스의 정경 목록(367년 부활절에 쓴 편지)이 반영되었다(397년 카르타고 공회의). 정경 목록을 채택할 때 모든 정경이 순탄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 중에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에 대해 의문은 마지막까지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왜 요한계시록을 정경에 포함시키려 하지 않았고, 왜 포함했을까를 생각하면 좀 더 쉽게 각각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정경에 포함시키려 하지 않았던 이유를 너무나 많은 상징 표현이 있어, 해석에서 그릇 이해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왜 요한계시록은 정경으로 채택했는가? 쉽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갖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혼란을 증폭시킬 위험성과 함께 그 위험성을 이길 수 있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그 유익이 필자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전제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유일한 가치는 “어린양의 영광”이 명료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주는 유익은 어린양의 영광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께 금대접(성도의 기도)가 올라가며, 어린양은 생명책을 열 수 있으며, 인-나팔-대접을 통치하는 주 하나님이시다(regnum gloriae Christi). 그리고 24 장로들은 어린양께 영광과 경배를 세세무궁토록 드림이 확실하다. 이 가르침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cuius regni non erit finis)”와 명료하게 연결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서 어린양께 드리는 영광과 경배는 이 땅 교회들이 취해야 할 예배의 대상, 믿음의 대상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믿음의 방향, 믿음의 대상을 가장 명료하게 제시하는 계시이다.

요한계시록의 정경화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정경 목록,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그리고 카르타고 공회의 결정이 일관성 있게 연결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과 통치이다. 그 가르침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 것이 신약성경 중에 요한계시록 밖에 없다. 그 가치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정경에 있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교부들이 우려했던 혼란의 가능성이 16세기부터 실현되어 21세기인 지금에는 바닷가에서 바늘을 찾아내야 할 정도로 혼란이 증폭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이 강조되는 곳에는 거의 이단이거나 이단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과정도 득세하는 이단으로 말미암아 변호적인 성격으로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결정한 것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아니고, 이단들을 위한 교범을 제공하려는 목저도 아니다. 성경은 믿음의 대상을 알고 믿음의 대상을 바르게 믿도록 훈련하는 유일한 문자(정경)이다. 요한계시록은 정경, 계시문서로서, 요한계시록을 읽는 사람은 명확한 믿음의 대상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성경 읽음의 유익을 요한계시록 독서와 연구에서 얻어야 한다. 성경 강의로 독자에게 맹신(盲信)이나 맹목(盲目)으로 경화(硬化)를 갖도록 한다면 성경 목적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성경은 빛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책이고, 진리를 밝히는 유일한 경전이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위험한 성경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를 세우는 생명의 말씀이다.

필자는 “맹인인 독자가 맹인인 지도자를 파악하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맹인이 눈을 떴다고 인식하는 것은 맹인인 지도자의 세계에 동화된 것일 확률이 너무 높고, 눈을 떴다고 착각하게 만든 맹인 지도자에게 맹목적인 자세를 취하는 이단의 전형을 취하게 된다. 자기가 주인인 상태에서 교주를 주인으로 삼는 행위가 된다. 복음에 순종하는 독자는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을 알고, 피조물로서 주 하나님의 자녀인 상태를 깊이 인식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즐거워하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3. 왜 종교개혁자들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지 않았는가?

성경주석을 체계적으로 집필한 최초 연구자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다. 그런데 칼빈이 66권 성경을 모두 주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중에 요한계시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칼빈은 사사기, 잠언 그리고 일부 구약성경(에스겔 20장까지 주석함)을 주석하지 못했고, 요한 2서, 3서도 주석하지 못했다. 구약주석은 성경강의를 편집한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최종판(1536(6장), 1539(17장), 1543(21장), 1550(약간수정), 1559(최종판, 80장))을 출판 한 뒤 프랑스어로 번역(1560년)했고, 1564년에 소천되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는 끊임없이 수정증보를 진행했고, 성경주석은 수정, 증보 없이 진행했다. 그리고 칼빈은 제네바아카데미에서 <기독교강요>를 강의하지 않았고, 성경을 강의했다. 그 강의가 구약주석으로 편집되었다. 그것도 에스겔 20장까지 진행한 뒤에 멈췄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최종판)>을 미완성으로 보는 것은 그가 더 오래 생존했다면 더 증보된 내용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1536년 초판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주석 작업이 미완성이다. 그 미완성에 요한계시록이 포함되어 있고, 요한계시록이 부각되기 때문에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음이 부각된 것 뿐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가장 먼저 시행한 주석은 <로마서 주석>이다. 스트라스부르그로 이주했을 때에 집필했다(1540년). 그럼 왜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처음에 주석했을까?라는 질문이 유효하다. 그리고 칼빈이 구약에서 집중적으로 주석하고 설교한 부분은 ‘시편’이다. 그것은 당시에 가장 첨예한 부분이 복음의 정수에 대한 부분이고,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이다. 복음의 정수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로마서라고 판단한 것이고,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의 대표적 부분이 시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과 청교도 연구자들이 시편을 많이 연구했다. 상대적으로 요한계시록의 문제성은 땅속에서 움이 뜨고 있었다. 칼빈이 그 당대에 로마서와 시편으로 교회를 변호하고 탐구했다면, 이 시대에 연구자들은 요한계시록으로 공격하는 이단과 거짓을 대항해서 변호해야 할 것이다.

칼빈이 왜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가장 쉬운 답은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 정답일 것이다. 그의 작업에는 주석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짧은 요한2서와 3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도 주목하면 된다. 빌레몬서와 유다서는 주석했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서 우선순위에 있지 않은 정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개혁신학은 성경 66권에 동일한 권위와 가치를 둔다. 칼빈은 카스텔리옹과 결별한 이유는 정경 이해 때문이었다. 정경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없는 것은 해석자의 해석 내용에 중대한 차이를 갖는다(참고, 마이어의 <성경해석학>). 칼빈의 성경해석은 개혁신학도들의 성경해석방법을 제시했다. 명료한 자기 신학(기독교강요)에 근거해서, 성경 66권을 해석해야 한다는 중요한 모범을 제시했다. 성경전체에 대한 자기 신학(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 신학에 근거해서 성경 본문에서 의미를 파악해서 결과를 제시해야 한다. 기독교 연구자는 성경 본문에서 어떤 의미를 도출시키는 것이 그의 열매이다.

4. 고경태의 요한계시록 전제: “어린양의 오심을 증거하라”

필자는 오광만의 요한계시록 <영광의 복음>(생명나무, 2011)을 보면서, 요한계시록은 앞의 형용(전제)문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연구자들은 각각의 전제문구를 사용하고 있고,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쉽게 풀이 될 수 없으며, 미래 지구 종말의 무서움을 제공하려는 목적이 없다. 그리고 어떤 짝을 이루어 답을 제공하는 짝도 아니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서 이해될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자기가 이해하는 한 문장을 제시해야 한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어린양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6 개월 정도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위해 연구하면서, “어린양의 통치, 교회와 성도의 고난 그리고 복음 전도”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어린양의 오심을 증거(전도)하라”고 전향했다. ‘어린양’은 요한계시록에서 바꿀 수 없는 전제이다.

먼저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은 ‘아르니온’이다. 요한복음에서 어린양은 ‘암노스(ὁ ἀμνὸς, 요 1:29, 1:36)’와 ‘아르니온(τὰ ἀρνία, τὰ πρόβατά, 요 21:15-17)’을 교차로 사용한다. 아직 누구도 ‘암노스’와 ‘아르니온’을 성공적으로 구분한 사례는 없다. 다만 아르니온을 묵시문학과 연속된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대세이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신약성경과 주전 2세기 유대묵시문학과 연결하는 것은 부당하다. 유대묵시문학과 계시문서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어린양에 대한 70인경 헬라어 번역은 ‘아르니온’이다. 아르니온은 어린양과 염소의 두 의미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레미아스는 어르니온을 염소라고 번역하는 것을 반대했다. 유월절 어린양이 아르니온이다. 그 아르니온은 죽임을 당했지만(계 13장), 천상에서 영광을 받는 아르니온(계 4-5장)이고, 천상에서 만유를 통치하는 만유의 주이시고(계 6-18장), 만유를 심판하시고 영원히 영광받으실 아르니온이다(계 19-22장).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두루마리의 예언을 지키며 믿음의 정진을 하도록 명령과 경고를 한다(계 22:6-20).

어린양의 영광, 요한계시록은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어린양’이고 예수 그리스도다. 먼저 어린양으로 요한계시록을 정리할 수 있다.

1. 어린양의 계시(1장)

2. 어린양의 몸: 7 교회(2-3장)

3. 어린양의 영광: 4짐승과 24장로(4-5장)

4. 어린양의 현재 통치: 인-나팔-대접(6-18장)

5. 어린양의 오심: 혼인과 영원한 통치(19-22장)

6. 어린양의 오심을 사모함(22장)

어린양의 영광, 그리고 어린양의 오심은 계 1:1절과 1:7(현재), 그리고 과거 계 13:8, 미래 계 19:1, 22:20에 근거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번역과 이해에 난점이 있다. 오시리라는 미래형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현재진행형(ἔρχεται)이다. 헬라어 현재 시제가 현재 시제가 기본 개념이지만 과거와 미래로 해석할 수 있다. 이필찬은 구름타고 오심을 ‘승천’으로 해석한다. 어떤 연구자는 현재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번역은 미래(혹은 현재)로 되었다. 필자는 구름타고 오심을 과거(성육신 그리고 십자가), 현재(천상통치), 미래(재림)의 삼중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오심은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된 시간 개념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현재 천상통치 그리고 재림을 한 눈에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양의 복음(오심)을 성도는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전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복음을 전도’하라는 명령은 없다. 다만 ‘성도의 인내’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다(요 14:12).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 중 하나가 ‘인내’이다. 구약성도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했다. 메시아 오심을 사모하는 민족은 이스라엘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유대와 베냐민 족속)은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동방박사들이 이방 지역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유대 땅에 와서 경배했다. 그런데 승천 후에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인내하면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주의 재림의 때가 주께서 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20절 “속히 오리라”(참고 계 1:1)고 말씀하신 주님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화답한 것은 복음을 전도(예수 증인)하겠다는 대답이다.

요한계시록 등장하는 성도의 기도와 인내는 정적인 견딤이 아니라 적극적인 순종이고 복음전도이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독자들은 극한 고난 상황에서 복음을 전도해야 할 매우 강력한 동기를 얻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매우 필요한 사안이다. 적들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에서 다양한 신학 논의와 토론은 중세를 방불케 한다. 신학논쟁이 유익하지만, 복음전도를 도외시하면서 해야 할 더 긴박한 사안이 아니다. 사도 바울처럼 어찌되었든지 복음을 전도하려는 의지와 시도와 추구가 있어야 한다(빌 1:18). 요한계시록은 복음 전도 의지를 돋우는 계시 말씀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어린양의 오심을 전하라”고 정의하면서 해석하려고 한다.

5. 나가는 말

요한계시록은 우리 시대에 반드시 정립해야 할 정경이다. 우리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계시 문서라는 신학을 갖고, 역사적-문법적 해석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을 추구한다. 여기에서 두 조건이 등장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계시 문서’이고, ‘역사적-문법적 해석’ 방법을 취함이다. 요한계시록 해석 조건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의할 것이다. 다양한 해석 조건은 전혀 다른 목표점을 타격한다. 탄착 지점을 확인하면 곧 포탄을 쏘는 위치와 방향을 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해석자는 자기가 목표로 하는 곳에 의미가 잘 도달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포격(砲擊)에서 관측장교(FO, Foward Observer)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정경으로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요한계시록이 무섭거나 혼란을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보다, 유익에 대해서 집중해야 한다. 이단이 제공하는 혼란한 해석을 바르게 교정하고,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을 줄 수 있도록 다양한 변호와 대체를 강구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시대에 가장 핫(hot)한 분야이다. 한국에서 등장한 이단 중에서 요한계시록 해석을 주되게 사용하지 않는 집단은 거의 없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극단적 세대주의로 유대교화 우려까지 있다. 한국에서 자생한 이단들은 요한계시록 해석을 통해서 극단적 종말론 혹은 교주의 신성화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의 사역자들은 그러한 혼란을 바로 잡을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한다. 그것은 칼빈이 <기독교강요>와 <성경주석> 과정을 통해서 당대에 기독교 변호를 했던 것과 유사하다. 16-17세기 유럽 기독교는 시편 연구를 많이 했다. 그래서 중세 로마 교회의 알레고리칼한 성경해석 구조를 탈피하려고 했다.

필자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고 이해하려는 전제는 “어린양의 오심을 증거하라”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도할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잘 읽은 1-2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역경 속에서 복음을 전도했다고 생각한다. 심한 상황이 닥쳐서 성도가 복음을 전도하지 않으면 결코 주 예수님은 오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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