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적인 성장과 변화는 오직 두나미스(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서울신학대학교 Th.D, 본헤럴드 발행인, 저서 : 주기도문연구, 충성된일꾼되어가기  등.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 “믿는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막16:17,18)말씀하셨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를 따르는 자는 반드시 믿음의 표적이 따라온다. 이 표적은 반드시 영적, 지성, 감성, 경제적, 육체적 분야에 믿음의 영향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아무런 변화가 내 삶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일 확률이 매우 높다. 내가 제대로 믿지 않았거나, 사모하는 마음이 약했을 경우가 많다.

제대로 믿으면 늘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나에게는 너무 큽니다. 기쁨과 감사로 채워져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은혜를 경험한 분들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문제앞에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크기에, 문제는 희미하게 보이고 주님의 은혜와 섭리는 더 크게 보일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어도 아무런 변화가 내 안에 일어나지 않을 경우, 원인이 무엇인가? 문제는 믿음과 삶이, 말씀과 삶이 따로 따로 노는 경우가 많다. 믿음과 행위가 서로 동전의 앞뒤처럼 딱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될 경우 우리는  4차원의 믿음의 표적을 경험하기는 불가능하다.

신앙이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무 많은 세상의 때가 끼어서 순수하게 아멘으로 받지 못하고 의심부터 한다. 성경을 읽어도,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생각과 지성이란 잣대로 다 재단한다. 꼭 편집비평하는 학자들처럼 대한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어도 자기 생각에 안 맞으면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한마디로 자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된다.

마지막 미전도 종족은 누구일까? 어떤분들은 목사이다. 목사가 깨져야한다. 내가 봐도 마지막 미전도 종족은 목사일 확률이 매우 높다. 목사들은 말한다. 마지막 미전도 종족은 중직자들이라고 한다. 서로를 향해 실패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자신의 벽을 깨지 못하고 갇혀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미전도 종족일것이다.

신학을 많이 배울수록 미전도 종족이 될 확률이 더 많다. 왜 그럴까? 성경을 더 많이 배울수록 미전도 종족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신학이 문제일까? 성경공부가 문제일까? 설교가 문제일까? 신학이나 성경공부나, 설교를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많이 배워야한다. 훈련으로 사람은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신학도, 성경공부도, 설교도 문제가 아니다. 어느 정도 문제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내가 보는 관점은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지성이 자란 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더 사모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경험과 능력과 지성을 더 높이 평가한다.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바울사도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갈라디아교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기준을 바뀌어 주었다, 이것은 아주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다. '영접하는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보다 혁명적인 언어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구원의 기준을 예수님으로 다시 세우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아니야 그 무엇을 다시 해야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현상은 비단 초대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더 그럴듯한 체계적인 어떤 양념이 더 들어가야 우아해 보인다는 생각에 집착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넘보는 경계선을 넘을려는 현대판 바벨탑의 유혹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 말고, 무엇인가 인간적인 지성의 양념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지성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위에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는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되새겨보아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할 또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나에게는 예수의 정신과 피가 흐르고 있는가? 구체적인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표적과 함께 우리가 생각해야할 연관된 주제는 표적에는 반드시 성령이란 주제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표적이란 구체적인 증거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지성. 이성, 감성. 과학, 의지는 너무도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믿으라,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라, 성령충만 받으라, 이 말은 예수의 영으로 충만하라는 말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부탁했다.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세계를 불사른 영적 거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진정한 성령의 사역에는 다섯가지 분명한 표지들이 따른다고 했다.:

성령은 언제나, (1)예수에 대한 큰 존경심(우러러 받들다)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님을 존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높여서 귀중’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2)사탄의 왕국에 대항하여 일하신다. 성령은 언제나 사탄을 대적한다. (3)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큰 존중심을 갖도록 한다. 성령이 임하시면 성경을 소중히 여긴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는다. (4)사람들을 진리로 이끈다. 진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하면 진리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 전도와 선교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5)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일하신다. 성령이 임하면 사랑으로 일한다.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율법으로 일한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무엇인가? 십자가의 사랑이 있으면 복음이고,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가 없으면 율법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이러한 표지들이 있다면 그것이 때로는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고 했다.(조나단 에드워즈, p77).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재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똑같은 사람인데 관점이 달라진다.

우리의 지성이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된다. 우리의 감성이 한결같이 따스함을 유지한다. 우리의 의지가 늘 확신에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 나를 늘 충만하게 채워주소서. 성령님이 충만하게 나를 지배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깨닫고 산다. 쓰임 받는 것에 늘 감사한다.

성령님이 임재하면 우리는 생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안된다, 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불가능하다에서 나는 할 수 있어, 나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이 임하면 나의 체질을 바꾸어 놓을 때까지 도전한다. 세상보다 더 악한것이 자신임을 늘 생각하면서, 날마다 회개한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기도하다가 중도에 포기했는데, 성령충만하면 응답할때까지 기도한다. 그리고 말씀에 확신이 올때까지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사모한다. 성령충만하면 거룩에 자신의 삶을 받친다. 성령충만하면 기쁨이 충만할 때 까지 봉사한다.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까지 헌금생활한다. 그런데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주님이 복을 주시든 안주시든, 관계없이 주님께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안다. 더 많이 못드려서 안따까워한다. 자신의 생명까지 전부 다 드리기를 원한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한결같은 특징이다.

성령충만하면 시험이란 주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 성령충만하지 않을때는 시험앞에서 시험 들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교회로부터 일터로부터 시험을 받을 때 해석에 놀라운 변화가 있다. 시험을 주시는 목적은 정금같이 나오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때 항상 테스트가 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기위해서는 꺾어져야 할 때는 꺾여져야 한다. 그래야 시험을 통해서 진짜로 정금같이 거듭나게 된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옥합을 깰 때가 있다. 누가 옥합을 깰 수 있는가? 성령충만하면 옥합을 깨는 것이 쉽다. 이브라함은 25년 준비한 후 아들을 번제로 드렸다. 옥합을 깨뜨린 것이다. 인생에 한번은 자식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야한다. 자녀들이 믿음생활 잘 안한다. 신앙의 거룩한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이땅에서 부모가해야할 가장 숭고한 헌신이다. 소중한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의 영적 자녀로 세우기 위해서는 모리아 산에 올라가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옥합을 깨뜨려서 자신의 머리를 풀어서 주의 발을 닦아야 하는 시점이 있다. 누가 옥합을 깨뜨릴수 있는가? 성령충만하면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 아깝지 않다. 그러나 율법적인 신앙인들은 옥합을 깨뜨리는 아름다운 신앙의 결단을 비웃을 확률이 매우 높다.

교회에서 우리가 늘 외치는 기독교적 언어가 있다. 부가(이미 있는 것에 새로운 것을 덧붙임)성장, 배가성장은 노력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30배 60배 100배 성장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폭발적인 성장은 헬라어 두나미스(권세와 능력, 다이나마이트)는 성령만으로 가능하다.

예루살렘교회가 단기간에 놀라운 성장을 했다. 이것은 성령이 끌고 온 사건이다. 성령님이 사람과 물질을 함께 끌고 온 것이다. 5천명씩, 3천명씩, 허다한 무리들이 교회로 몰려와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인간의 산술적인 계산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과학적인 계산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폭발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그것은 두나미스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우리들의 일터도 마찬가지이다. 노력으로 배가 성장은 가능하다. 그러나 30배, 60배, 100배, 그 이상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주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지성으로 감성으로 의지로 신앙을 받아들인다. 이것만으로는 기독교를 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3차원의 땅의 지혜로 하늘의 것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늘의 사건의 4차원의 영의 세계이다. 영의 세계를 땅의 지식으로만 해결할려고 하는 것은 아주 어리것은 몸짓이다. 영은 영이다. 3차원의 땅의 지혜로 성경을 보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표적을 잘 믿지 않는다. 옛날에는 악기도 없고, 음향시절도 형편없고, 예배공간도 불편하지만 능력이 나타났다. 오늘날  이런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우리는 느끼고 있다. 답은 하나이다. 성령이 와야 한다. 우리의 지성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회복하라. 성령을 구하라. 성령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귀와 마음과 생각과 입을 열어 성령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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