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칭의와 의의 관계 : 유월절과 무교절의 적용

저자 송명덕 목사는 오직 한 길만을 간 목사이다. 총신대학교와 총신대 학 신학대학원과 총신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화성 동탄의 제자비전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5. 칭의와 의의 관계 : 유월절과 무교절의 적용

칭의와 의(righteousness)를 여호와의 절기인 유월절(Pass over)ㆍ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 Bread)에 적용해보자. 유월절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예표하므로 ‘구원과 칭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유월절은 7일 간 계속되는 무교절로 이어진다. 무교절은 누룩이 없는 떡을 먹는 절기이다. 누룩은 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무교절은 ‘죄를 이기는 삶’ 즉 ‘의(the righteousness)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유월절을 어린양을 잡고 피를 바르는 것으로 끝난다고 간주한다. 성경은 결코 유월절은 유월절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무교절이 없는 유월절이라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유월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 ‘칭의’ ‘의롭다 하심’으로 끝나고 만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나 ‘애굽의 생각’이나 ‘광수의 생각’이지 ‘성경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다. 성경에서 유월절은 즉시 7일간의 무교절로 이어진다. 이것은 양자가 어떤 관계에 있다는 의미인가? 칭의,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죄를 이기는 삶,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우리들은 유월절을 주목할 뿐 아니라 무교절도 주목해야 한다.

“죄악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누룩)를 이기는 의(the righteousness)의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럴 때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사자성어가 있다. 복음서에도 나오는 말로서 ‘유’자로 시작해서 ‘언’자로 끝나는 유명한 사자성어가 있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만일 ‘없을 무’자가 싫은 나머지 ‘있을 유’자로 바꾸어 ‘유구유언’(有口有言)이라고 한다면, 상당한 문제가 있다. 이런 상황을 나타내는 적절한 이모티콘이 있다. “uu” or “ㅠㅠ”  필자가 볼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한글이 더 적합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교절을 지키라’고 한 까닭은 무엇인가?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지키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생각은 모세를 거역한 ‘고라의 생각’이나 ‘다단과 아비람의 생각’이지 ‘모세의 생각’이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생각’은 아니다.

외식을 한 후에 때때로 필요한 것이 ‘이쑤시개’이다. 늪의 무법자 악어도 ‘이가 오복 중 하나’라는 것을 아는지 ‘악어새’라는 살아있는 ‘이쑤시개’를 사용한다. ‘이쑤시개’를 두 음절로 줄이면 무엇인가? 답은 ‘요지’이다. ‘요지’는 외식 후에도 필요하지만, 글을 읽을 때 더 필요하다.

‘고라의 생각’은 ‘모세의 생각’과 달랐다. 그러나 ‘고라의 패밀리’ 가운데 제외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고라 자손’이다. 그는 ‘고라 패밀리’였지만 그의 아비와 형제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시편 2권의 첫 시편 42편을 기록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석과도 같은 여러 시편을 남긴 사람이 고라 자손이다. 그는 육신적으로 ‘고라의 패밀리’에 속했지만 ‘혈연의 관계’인 부모형제를 뛰어넘어 하나님 편에 서서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아비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은 ‘고라 자손의 의(righteousness)이다. 그와 반대로 모세를 거역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칭의/구원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의(righteousness)가 없었다.


6.  고라와 다단의 반역 사건과 칭의와 의(righteousness)의 적용

이 사건을 칭의와 의의 문제로 적용해 보자.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통과한 ‘구원받은 사람’으로, 칭의(Justification),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여호와의 밤에 그들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애굽사람보다 선하고 행실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를 그의 집의 인방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어린양의 피를 믿은 사람에게는 모든 정죄와 죽음과 저주가 넘어갔다. 그 결과 ‘구원과 칭의’가 주어졌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것도 유력한 사람들이 모세를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양대 칭의론은 이것을 어떻게 보겠는가?

필자의 생각에 톰 라이트와 새 관점 칭의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구원받은 자의 멸망’으로 볼 것이다. 필자가 확언하건대 이들이 문제가 있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받은 신자의 멸망, ‘구원 탈락’이란 불가능하다. 새 관점 칭의론은 고라를 비롯한 모세를 대적하여 심판을 당한 사람들이 이전에 유월절에 참여하여 받은 ‘칭의’가 있음에도 ‘구원 탈락’으로 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받았던 ‘칭의는 유보되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에 반하여 존 파이퍼와  박영돈 교수 등 전통적 칭의론에 선 학자들은 ‘칭의의 불변성’을 주장하고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성경의 진리라는 것을 필자도 동의한다.) 적절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거짓 신자’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계속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은 결코 거짓 신자가 아니다.

필자가 ‘이렇게 예상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양대 칭의론 논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고라의 거역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대 칭의론이 주장하는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필자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심판받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자의 멸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여호와의 밤에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이 ‘어린양의 피’ 때문이 아니라 ‘애굽사람보다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면 혹시라도 ‘구원의 탈락’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유월절의 밤에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호와께서 그 밤에 주목하여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피를 볼 때에(when I see the blood) 너희를 넘어가리니(will pass over you)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성경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자죽임의 재앙 가운데 멸망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한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거짓 신자’나 ‘칭의가 소멸’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칭의(Justification)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후’의 문제로서 의(righteousness)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하나님 나라의 권위에 순종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모세를 대적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생활의 문제’로서 ‘의’(righteousness)의 문제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라 자손은 아비를 따르지 않고 모세의 편에 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라자손의 의’(righteousness)이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신 의도에 ‘숨겨진 보물’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죄를 이기는 삶’ ‘의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이미 유월절 어린양이 그들의 모든 죄와 허물과 저주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무교절을 지킨 후에 유월절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면 ‘구원의 ABC’가 완전히 뒤집히는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righteousness)를 행한 후에야, 유월절 어린양의 피(칭의)로 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감사한 것은 그런 생각은 ‘광수의 생각’이든지 ‘우리의 생각’이지 ‘성경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다. ‘구원&칭의’를 의미하는 유월절은 ‘단회적’이다. 반면에 ‘의의 생활, 구원받은 후의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무교절은 ‘7일간 계속’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포이에마, 걸작품’인가!

‘칭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한 후의 법정적인 선언이다. 칭의는 ‘유월절’에 비유될 수 있다. 죄로 오염된 사람은 절대적으로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의 흘리신 피’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것이 칭의(Justification)이다. 칭의-의롭다는 선언은 ‘죄에 대한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산상수훈에서 언급된 ‘의’(righteousness)는 칭의(Justification) 즉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의(義)는 칭의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받은 것과 다르다.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구원/칭의’를 받은 제자들이 ‘의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삶에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행함’이 필요하다.

칭의(Justification)는 전적으로 ‘구원의 개념’ ‘구원의 DNA’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의’(your righteousness)의 문제는 ‘칭의의 문제’ ‘구원의 문제’와 일치하지 않고, ‘칭의/구원 이후의 문제’와 일치한다. 성경은 이것을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 부른다. 천국이란 구원받은 신자의 순종의 문제이고, 주님이 신자 안에서 ‘왕 노릇’ 하시는 문제이고, 신자가 의롭게 사는 문제이다.
 
 본서와 짝을 이루는 필자의 저서 ‘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의 중요 메시지는 “구원(칭의)이란 무엇인가? 천국이란 무엇인가?”이다. 즉 “구원과 천국이 동일한 것인가? 다른 의미인가?”라는 주제를 다뤘다. ‘구원(칭의)의 DNA’와 ‘천국의 DNA’의 ‘차이나(china)’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지대물박’(地大物博-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하다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중심이라 여기는 ‘차이나’(China)에 매장된 세계 최대 매장량의 희토류의 독점판매권을 얻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

양대 칭의론 논쟁 중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중요한 두 주제는 본 장(chapter)에서 언급하는 칭의(justification)와 ‘의’(righteousness)이다. 만일 이것을 같은 것으로 본다면 문제의 해결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된다. 왜 성경은 ‘남북이 멀다’가 아닌 ‘동서’가 먼 것을 언급했는가? 지구는 자전으로 인해 남북은 멀어도 남극(Sourth Pole)과 북극(North Pole)이라는 끝이 있다. 지구의 반지름이 약 6,356Km이니 남극과 북극의 길이는 12,712Km이다. 그러나 지구의 자전은 동서(東西)가 어디인지를 구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동극’(East Pole)과 ‘서극’(West Pole)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이 서에서 먼 것’은 ‘제한적이지 않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만일 칭의와 의, 양자가 서로 구별되는 개념임을 발견한다면 ‘북과 남, 북극과 남극이 멀어도’ 제한적인 것처럼 해결의 가능성이 있다. 필자가 한 가지 팁을 선물한다. ‘의(your righteousness)의 문제’와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명제는 성경을 보는 중요한 관점이다. 칭의는 구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의’(righteousness)는 ‘천국’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오늘날 가장 큰 오류는 ‘칭의’와 ‘의’(righteousness), ‘구원’과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구원과 천국의 본질을 깊이 알기 원한다면 필자의 책 “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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