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7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지난 몇 주에 걸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랄 수 있도록 은사와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교회의 선물로 주셔서 이 일이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면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기 때문에 교회와 그 안의 지체들은 반드시 자라나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라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15절의 참된 것을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16절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사랑 안에서”입니다. 참된 것을 하는 것도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것도 사랑 안에서입니다. 

먼저 참된 것을 한다는 것은 진리를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원문의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진리를 듣고 말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을 수 있고, 사람의 속임수와 사단의 악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진리를 듣고 배워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길과 진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계속 기록된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밝혀야 합니다. 올바른 말씀의 해석을 통해서 진리가 선포되고 진리가 가르쳐질 때 교우들이 온갖 세상 풍조로 물든 교훈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과 열을 다해 우리의 신앙을 해치는 유혹과 거짓된 교훈들이 틈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참된 것, 그리스도의 말씀, 곧 진리를 말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반드시 그것을 행해야 합니다.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가 고백한 신앙대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진리를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 원리와 목표대로 적용하고 반응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숙해있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돈을 버는가? 어떻게 하면 명예가 나오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이익을 보고 혜택을 누리는가? 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행한다는 것은 그렇게 세상에 의해 길들여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편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말씀의 원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조그만 것에서부터 참된 것을 행하는 훈련이 되어 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가 되어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 바 그 진리의 말씀과 말씀의 원리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벌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거나 상을 위해 집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배우고 말하고 그 진리를 행하라고 합니다. 진리가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요14: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계명, 곧 진리를 행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14:24절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그리스도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4:21절은 이렇게 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계명, 곧 진리는 사랑과 함께 연결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진리와 참된 것, 옳고 그른 것,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언제나 우리가 살면서 정해놓은 도덕과 윤리의 차원으로만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것, 진리는 그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편들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을 보십시오. 그녀는 동족을 배반했습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를 복주고 칭찬했고 그의 가족들을 구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편들었기 때문입니다. 편든다는 것은 이 세상 기준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랑할 때 나오는 열매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16절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원리를 자라남으로 적용하는 것에서 더 확실해집니다. 16절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도움을 입어 연결되고 결합되어 자란답니다. 그런데 자라는 것이 내가 자라리라고 결심을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잘 붙어 있으면 머리로부터 모든 것이 공급되고 연결되어서 몸이 자란다고 합니다. 그렇게 몸이 자라는데 어떻게 자랍니까?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손이 움직입니다. 발이 갑니다. 입이 말합니다. 그러면 그 활동을 누가 합니까? 겉으로 볼 때는 손이 하고 발이 하고 입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머리가 명령한 것입니다. 몸의 지체는 머리가 명령하는 것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런데 각 지체가 머리의 명령대로 수행하는데 결과는 몸이 자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체가 머리의 명령을 수행할 때 무엇으로 합니까? 나는 하기 싫은데 머리가 하라고 하니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사도는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합니다. 사랑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편드는 것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그가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도 그가 좋아하니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도 그가 싫어하니 안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를 뛰어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믿고 합니다. 옳고 그름을 뛰어넘습니다. 옳고 그름을 뛰어넘어 그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사랑 안에서 세워지고 자라갑니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 닮아가는 원리가 같습니다. 부부는 같이 사는 세월만큼 닮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닮아지는 것을 이제부터 우리 서로 닮아가자 라고 각오하고 결심하여 치열함과 비장함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싫으나 좋으나 같이 살기 때문에 서로 맞추어 사는 모든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결과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어 가는 것은 사랑 없이 안 됩니다. 사랑하기에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복을 얻어내고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 신앙생활이 동원되는 것은 거래의 관계입니다. 거래는 자라지 않습니다. 거래는 일이고 성취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런 거래의 관계가 아닙니다. 언약의 관계이고 철저하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렇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권면을 받고 있는 에베소 교회가 사랑 안에서 자라는 일을 어떻게 했습니까? 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가 바로 이 면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간절하게 권면했던 이 권면은 몇 십 년이 지난 후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때가 A.D. 60-62년 정도이고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에베소 교회에 관한 계시를 받았을 때가 A.D. 95년경입니다. 그러니까 약 30여년이 지난 후에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에게 이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계2:1-5을 함께 볼까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첫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첫 사랑을 버렸으니 촛대를 옮긴다고 합니다. 첫 사랑을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첫 사랑하면 보통 뜨거움과 열정을 생각하는데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그 뜨거움과 열정이 식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하고 봉사를 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진리를 행하지만 그것을 사랑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역시 부부를 생각해보십시오. 서로 간의 마음의 교류가 단절된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 때문에, 혹은 재산 때문에, 혹은 다른 사람의 평판과 이목 때문에 갈라서지 못하고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커서 결혼만 하면 내 저 원수와 반드시 갈라설 거야” 이런 경우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아이를 키우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이 부부의 경우 서로의 사랑은 자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자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정열, 그 뜨거움, 그 열심이 함께 살아가면서 힘들고 실망스럽고 어려운 많은 일이 있지만 그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닮아가는 것으로 반드시 자라야 합니다. 첫 사랑을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열심과 뜨거움이 식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결국 그 사랑을 함께 살면서 당연히 나타나는 믿음으로 성장시키고 자라나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첫 사랑은 시작입니다. 시작은 뜨겁고 열정적이지만 그것은 겨우 점을 하나 찍은 것에 불과합니다. 점을 찍은 그 사랑은 소설 속의 사랑이 아니라 실제로 같이 살면서 서로 실망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수많은 고민과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길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높이가 있고 깊이가 있는 사랑으로 키워하고 자라가게 해야 할 숙제입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처음 주를 뜨겁게 믿은 그 사랑은 마땅히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진리를 행하고 참된 것을 할 때 수반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다고 사랑 안에서 자라는 것은 외면하고 포기한다면 에베소 교회처럼 첫 사랑을 버린 것 때문에 촛대를 옮기겠다는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버리면 다른 모든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맺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생활은 악한 자들이 들끓고 행악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거짓말하고 속이는 이 세상에서 귀찮고 어렵고 힘들어보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배우며 그 참된 것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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