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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기로에 선 인생신앙의 중간지대는 곧 선택의 능력을 상실한것이다.
  • 발행인 최원영목사
  • 승인 2018.02.1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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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기도원에서 내려다본 전경

사람의 일생은 분기점에서 결정된다”라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분기점에서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은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에 피하지 말고 과감히 선택하고 도전하라고 한다.

모세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자 백성을 모아 놓고 설교를 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과 복을 택하라고 강권했다(신30:15-20).

여호수아도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자 백성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선택할 것을 권면했다.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4). 또한,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수24:15-18)않겠다고 결단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렘21:8)는 메시지를 받고 전했다.

죤 옥센함(John Oxenham)이 이런 시를 썼다.

“모든 사람에게 열린다. 이 길과 저 길과 또 여러 길이; 높은 영혼은 높은 길을 밟고, 낮은 영혼은 낮은 길을 찾고, 안개가 자욱한 들판속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이를 방황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열린다. 높은 길과 낮은 길이; 그러면 각자 결단한다. 자기의 영혼이 갈 길을.”

오늘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가련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길이 살길인가? 고민하고 갈등한다. 어떤 분들은 선택할 힘과 마음에 여유가 없어 중간지대에서 시간을 끌며 괴로움속에 지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한다. 여호와가 참신인지, 바알과 아세라 신이 참신인지를 가리는 영적 대결이다. 이 결판은 850:1의 싸움이다. 숫자로는 이미 패한 싸움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영적 전투를 하기 앞서 백성들에게 선택할 것을 권면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 마다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신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고 선택을 하지 못했다.

왜 사람들이 중간지대에 있을까? 지혜로워서 그럴까? 아니면, 왜 선택을 확고하게 못할까? 확신이 없어서이다. 다른 말로하면 믿음이 없어서이다. 하나님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오, 나의 인생을 세밀하게 인도하고 섭리하고 역사하신다는 확신과 믿음과 신앙이 약해서 선택을 못하는 것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 신문 발행인, 본국제신학교학장, 서울신학대학교Th.D. (사)새길과 새일 부이사장.(재)본월드미션 이사. 등. 저서: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권,2권) 등.

신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항상 질문을 던져본다. 신앙이란 선택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나는 늘 정의를 내린다.

예수 믿기 전에는 늘 보이는 대로 선택했다. 보이는 대로 생각했다. 보이는 대로 느꼈고, 보이는 대로 말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는 보이는 대로 선택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말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생각하지 않을려고 노력한다.

《두 문 : 좁은 문 vs 넓은 문》

예수님은 제자들에서 두 길이 있다고 제시했다. 두 길 중에서 반드시 한 길을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그 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일꾼의 사명이며, 일꾼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제시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첫째,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다. 문이란 상징 코드이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적고,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많다고 한다. 좁은 문은 구원의 문을 의미한다. 넓은 문은 세상을 의미한다.

구원의 문은 오직 문이 하나이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문 밖에 없다. 이 문을 통과하는 자만이 천국의 백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롬10,9,10,13).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은 구원의 문은 아주 좁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다.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 이 사실은 우리 기독교가 존재하는 이유이요, 전도와 선교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본성으로, 자기의 지식으로, 자기의 경건성으로, 이 구원의 길을 찾으면 좋은데, 문제는 그것으로 찾을 수 없다. 종교적인 의무를 아무리 잘해도 구원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둘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결단해야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누가복음 같은 본문에서는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라고 했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전달해주는가? 이 문의 구조를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들어가도록 개인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고, 영적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다.

아내가 잘 믿는다고 내가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장로님이라고 권사님이라고 내가 천국 백성이 되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목사라고 내가 천국 티켓을 선물로 받는 것도 아니다. 주일마다 가끔씩 교회에 도장을 찍는다고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도록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편협적 종교라고 조롱한다. 왜 예수그리스도만을 믿고 고백해야지만 구원을 받느냐. 아주 독선적이라고 공격한다.

우리는 두 길중에 한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한다. 중립적인 길은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가든지 넓은 길을 가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참된 문은 좁으며 그 문으로 인도하는 길은 어렵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결단해야 한다. 결단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변화산기도원 정문

《두 길: 좁은 길 vs  넓은 길》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두 길의 차이점의 결론이 아주 분명하다. 어떤 분의 설교집을 읽다가 공감한 내용의 소주제을 발견했다. 두 길을 아주 명확하게 구분해 놓았다.  소주제에 해설을 달아보고 싶다.

첫째, 어려운 길과 쉬운 길이 있다. 위대한 인생의 문을 여는데 있어서 쉬운 길은 결코 없다.  위대함이란 언제나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다. 두 길 중에 어려운 길을 선택할 때 삶의 보람과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된다. 어려운 길은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지 않는다. 힘들기 때문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하면 그것이 블루칩 된다.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경제가 경쟁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걱정을 하고 있다. 세계 1위 상품의 자리를 점점 빼앗기고 있다. 한국이 기술력과 경쟁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블루오션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블루오션은 경제용어이다. “경쟁 없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경쟁력을 키우는 일.”것이다. 어려운 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은 인생의 가장 값진 블루오션을 얻는 길이다.

둘째, 먼 길과 짧은 길이 차이이다. 순식간에 한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결과는 언제나 작은 미세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인 결과이다. 명품과 짝퉁의 차이점은 아주 작은 차이이다. 미세한 부분을 누가 더 공을 들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영구적이고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얻는 것은 그렇게 빨리 오지 않는다. 결국 먼 길이 최선의 길이다.

셋째, 훈련된 길과 방종의 길의 차이이다. 세상에는 아무것도 훈련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다. 훈련 없이는 아무도 뛰어난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가 얻은 명성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훈련된 길을 가는 사람과 방종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면, 젊은 날에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5-10년 지나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좋은 일꾼이 되는 길은 훈련이 필요하다. 예배, 기도, 말씀읽기, 봉사, 이것이 영적 성장의 지름길이다.

넷째, 생각이 깊은 길과 생각이 없는 길의 차이이다.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쉽고, 짧고, 훈련없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두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현재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과 장차 어떻게 보일것인가 하는 것이다. 쉬운 길은 항상 부담감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어려운 길은 항상 겁이 나고 힘들어 보인다. 올바른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길의 시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보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볼 때, 지금 현재의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관점에서 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 지금 현재의 시간만 보면, 눈에 좋은 것만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세계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쉽게 답을 얻게 된다.

인생의 가치는 아주 사소한 것을 누가 더 예민하게 정확하게 정직하게 하는가에 따라 삶이 품위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깊어야 된다. 생각이 깊지 아니하면, 망령되이 행동하게 된다. 이것이 인생의 큰 걸림돌이 된다. 어떤 일을 하든지 깊이있게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항상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선택하는 것이 아주 쉽고 편하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현실, 내 인생, 내 가정에만 초점을 맞추면, 정작 중요한 것은 다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겁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없는 삶으로 귀결되기 쉽다.

두 길이 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다. 우리에게는 중간지대가 없다. 중간지대를 가고자 한다면, 결국에는 불신앙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일생동안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불편한 길을 행복하게 기쁘게 감사하게 사명을 다해 걸어가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믿음의 길을 늘 선택하며 살아가는 충성된 일꾼의 길이다. 사명의 길은 항상 불편하다. 그리고 부담감이 많다. 늘 어렵고 힘든 요소들이 참으로 많다. 늘 내려놓음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혀 힘들지 않다. 억지로 끌려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제자의 길이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자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사명의 자리에 불러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된다. 사명의 자리, 헌신과 순종의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신 보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꾼은 어디서 행복을 찾는가? 일터에 있을 때 행복하다. 일꾼이 일할 곳이 없어서 길거리를 방황한다고 생각해라. 전혀 행복하지 않다. 일꾼은 일터에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일을 할때 행복하다. 좁은 길을 행복하게 걸어가는 일꾼이 되는 것이 복이다.

발행인 최원영목사  jho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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