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라는 새로운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그 결론격인 13장에서는 다시 "사랑"의 주제로 돌아옴으로써 1)교회의 덕을 세우고, 2)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3)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4)교회의 평안을 위하는 최선의 길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1-3절에서는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을 말하고 있고, 2) 4-7절에서는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3) 8-13절에서는 "사랑의 영속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12장에서 언급된 고린도 교인들의 여러 가지 은사를 염두에 두고 “사랑 없는 은사와 섬김과 헌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라고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겐 이 말씀이 아주 명쾌한 내용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사랑없는 목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내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힘쓰고 있는 모든 것들에 과연 참된 사랑이 함께 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어서 나오는 구절들에서 "참 사랑"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참사랑은 먼저 [적극적인 면에서]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소극적인 면에서]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최근에 사랑하는 교우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보고 말씀과 기도와 삶과 사역의 본으로 양육하면서 지금까지 누구보다 속 사랑으로 목회를 해왔다고 자부하며 살았지만 제 생각과 마음과는 달리 성도들이 저 자신과의 사이에서 또한 서로들 상호 간에 사랑의 교통과 체감을 목말라 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어 송구스런 마음과 함께 새로운 변화와 헌신을 각오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1)무엇을 가지고 2)어떤 것을 표준으로 우리 자신들 안에서 이런 개혁과 갱신이 가능할까요? "우리 모두를 향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답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이 참 사랑의 실체로 비추어 볼 때  저 자신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에게도 그것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다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일그러진 우리의 인격에 다시금 넘치도록 부어져 첫 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의 수고로 살아가고 일해나가는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길 간절히 빌 뿐입니다.

13장 4-7절입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 어느 것 하나 설명이 필요 없으면서도 깊이깊이 되새겨보아야 할 귀하고 귀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식으로, 자기만족 위주로,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타적이며 상대방을 최대한으로 배려하는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 가지만 특별히 주목할 대목이 있다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한 데입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1)진리를 버리고 2)악한 일이나 3)불의한 일을 감행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악하고 불의하며 진리가 아닌 것을 합리화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악이나 2)불의나 3)거짓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참되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목적"을 "오직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한 방법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예외없이 그 사랑의 잘 못된 방법 때문에 사랑을 늘 노래하고 항상 목말라 하면서도 그 사랑 때문에 늘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럽고 괴로워 하고 아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는 1)오래 참을 수 있고 2)모든 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도저히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위해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용서받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용서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3장 8-11절에서 성령의 다른 여러 가지 은사들이 '부분적이며 현재적인 성격'을 가진 데 반해 "사랑은 '영속성'을 지니는 은사"임을 강조합니다.

먼저 9-10절에서 그는 쓰기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합니다. 9절의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한 데서 “부분적”이란 말은 10절에서 말하는 “온전한 것”에 대비시켜 “온전하지 않은”이란 뜻으로 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란 "그리스도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의 때"를 가리킬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란 지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필요한 이런 저런 은사들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의 대비를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2절에서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 한 것은 그 당시의 거울은 오늘날 같이 유리로 만든 것이 아니고 금속물을 갈고 닦아서 광택을 낸 거울이었기 때문에 선명도가 떨어지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는 '광택 나는 구리로 된 거울'을 생산하는 곳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들"은 사실 1)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기 위한 은사들이며, 2)하나님을 더 잘 알아서 그의 뜻대로 더 잘 행하며 살게 하기 위한 은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이 어린아이의 것과 같다가 장성한 어른의 것과 같이 되는 때, 구리거울로 보듯이 희미하던 하나님 지식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은 온전한 지식이 되는 날,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해지는 그날이 오면" 그런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변함없이 그 가치가 살아남을 은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열매를 맺고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더 이상 '믿음'과 '소망'도 그 존재의 이유가 사라질 때가 있을지라도, 영원히 그 가치와 존재의 이유가 살아 있을 은사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가장 크고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 나라 삶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하는 삶을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말한 것이 바로 모든 성경구절 중에 가장 유명한 구절의 하나인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의 말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제일”이라 한 것은 “더 큰 것”이란 의미입니다. 즉 세 가지 중에서도 "영원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이며 가장 큰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에게서도 가장 큰 덕목은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사도 바울은 롬13:8-10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계명의 실천도 사랑이 없이 행하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의 “사랑이 없으면”이란 글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랑이 없는 의무감은 무뚝뚝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책임감은 냉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성은 교활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령은 비열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힘은 난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예는 오만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부는 탐욕스럽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미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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