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종교개혁의 핵심가치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탐구는 성경 밖에서(라이마루스), 윤리탐구는 성경 안에서(A. 리츨) 시도했다.

신학자 알프래드 리츨은 “신약성경에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명시적인 문구가 없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는 이해라고 했다. 그리고 지상에서 완성된 윤리적 하나님 나라 건설을 제안했다. 19세 말엽 유럽에서 그것이 가능할 것 같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유토피아였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에서 “성경으로 신학한다”는 새로운 가치를 제안했다. 그것은 중세 로마 교황주의에 대한 개혁이었다. 고대교회는 예수를 직접 경험한 사도와 속사도 등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신학을 했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교권주의로 신학을 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파괴한 교권주의를 거부하고 새롭게 성경으로 신학함을 제안했다. 교황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를 더 높이면서 진행한 것이다. 목사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그런데 성경의 권위만 높이면 바른 신학하는 유일한 자세인 것처럼 이해하는 부류가 발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단들이다. 여호와 증인들은 성경을 질문하면서 미혹했고, 신천지는 성경풀이로 한국 교회를 공격했다. 그러나 신학에서도 유사한 태도가 있다. 성경으로 신학하면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성경으로 신학함의 원리를 파괴할 수 있다.

성경으로 신학함은 구원하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교회의 몸부림에서 발생한 원리이다. 성경으로 신학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아직까지는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을 발화시킬 다른 대안이 없다. 그래서 성경으로 신학해서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을 전할 것인가? 성경으로 신학해서 바른 의미를 발생시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성경은 죄인을 구원한 뒤에 제공할 양식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은 죄인을 구원하는 방편은 전도자가 복음 전함에 있다. 복음으로 구원되어 예수를 믿는 자녀는 성경 해석으로 양산된 의미로 구원을 진행한다. 사도행전에서는 구약에 대한 이해가 있는 유대인과 경건한 헬라인을 대상으로 전개한 것이다. 구약 이해가 없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은 철학, 웅변이 아니라(행 17장) 확고한 믿음, 죄인을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고전 1장).

“성경으로 신학한다”는 것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계시문서로 확립하는 것이다. 장로교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장 진술을 견지할 때에 가능한 고백이다. 장로교 신학자와 목사 그리고 성도들은 장로교 표준문서에 근거해서 신앙생활과 신학을 해야 한다.

신학과 신앙에서 자기 표준을 제시하는 것은 평가를 위해서 당연한 것이다. 신학자나 목사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딤전 4:12-16). 타인이 평가할 수 있도록 표준을 밝혀야 한다. 자기 신학의 핵심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옳은 신학을 하는가? 죄인을 구원할 복음 탐구와 전파를 위한 신학을 하는가? 자기 신학을 위한 표준 문서는 무엇인가?

필자의 표준문서는 고대교회 4대 공회의 신경과 16-17세기 종교개혁 칼빈 신학 계열의 신앙고백서이다. 그것에 근거해서 성경으로 신학한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4대 공회의와 16세기 루터의 신학 아래서 성경으로 신학한다고 한다(참고,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성경해석학> 송다니엘, 장해경 역, 영음사). 두 진영이 성경을 계시문서로 확정하면서 전개하지만, 루터와 칼빈의 이해에 따라서 약간의 해석 차이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성경을 비평이 가능한 문서가 아니라 정확무오한 계시문서로 보는 자세는 동일하다.

신학은 신학 발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의 성경 해석에서 그 가치가 드러난다. 성경 해석으로 복음을 설교함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복음 전도(per Verbum)로 신자가 신자되고,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복음 역사가 성령으로(cum Verbo)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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