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직과 예배의 진정한 회복이야말로, 후기 기독교 사회의 대안

 한국 사회의 독특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속도’(speed)일 것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의 폐허위에 세워진 남한 사회의 기적적인 발전 속도를 시작으로 하여 정보화 사회망의 확산 속도에 이르기까지, 가히 모든 발전과 변화의 양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다. 그래서인지 미래의 트렌드 변화를 예측해 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실험장이 바로 한국 사회이기도 한 모양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독특한 변화 속도는, 기독교(특별히 개신교) 신앙 가운데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교회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 역사의 변화들은 보통 수백 년의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불과 그 정도의 기간을 통해 선교 시대부터 후기 기독교 사회(post Christendom)에 이르는 거의 모든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작금의 한국 기독교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후기 기독교 사회로의 몰락을 향하고 있다. ‘교회 세습’이니 ‘가나안 성도’니 하는 현상들은 바로 그처럼 후기 기독교 사회로 몰락해 가는 붕괴의 잡음들이라 할 것인데,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문화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간에 사회에 대해 선도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일례로 교회에서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어느덧 세속법정의 판결밖에 없는 실정이 되어 있으니, 사회적으로 교회는 언제든지 분쟁을 초래할 수 있는 잠재집단과도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한국의 교회들이 이미 후기 기독교 사회로 접어들어 있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지표인 ‘가나안(교회에 안 나가는) 성도’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는 곧 신앙의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현상으로서, 한국의 교회들이 신앙의 정체성을 상실한 명목상의 신앙인이자 교회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실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자들을 양산한 것을 단적으로 예표하고 있다.

사실 ‘가나안 성도’의 현상은 교회사에 있어 비교적 최근인 1920년대에 일본(우찌무라 간조가 대표적 인물)과 한국(김교신, 함석헌이 대표적 인물)에서 잠시 유행했던 ‘무교회주의’ 현상과도 같은 맥락의 현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뿌리는 영국 국교회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퀘이커파’(Quakers)와 ‘다비파’(Darbyites)이며, 더욱 깊은 근원은 종교개혁 시대에 있었던 ‘재세례파’(anabaptist)에까지 소급된다.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연구회 회원)

하지만 이미 본격적인 교회개혁의 시대인 16세기 프랑스 위그노들의 신앙고백서에서부터 무교회주의의 현상에 대한 경고가 아주 분명했었다. 즉 프랑스 신앙고백 제26조를 통해 위그노들은 고백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의 모임에서 스스로 떠나 개인적인 간구를 드리는 것은 위법(율법의 위배)이라고 믿는다. 오히려 모두 연합하여 교회의 공동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신앙이 진정으로 성숙해지려 할 때마다 이것이 모든 기본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교회의 참된 제도를 세우신 곳은 어디든지, 비록 관원들의 법령이 이러한 교회의 제도에 반(反)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와 공적인 가르침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과 함께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은, 매우 비뚤어진 행동이며 멸망의 재앙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하게(또한 일치하여) 고백하고 있다.

물론 소위 가나안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교회(congregation)에 안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못나가는 것이다. 도무지 교회라고 불릴 수 있는 예배당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 가운데 신앙의 정체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처럼 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오히려 그들이 교회에 안 나가며 인터넷 화상으로 좋아하는 설교만을 취하는 그 자체가 이미 그들 신앙의 정체성 상실을 고스란히 입증한다 할 수 있다. 당장에는 피해의식 가운데서 그러한 행위가 정당하게 생각될 것이지만, 프랑스 신앙고백을 작성한 위그노들에 따르면 그런 행실은 “매우 비뚤어진 행동이며 멸망의 재앙에 참여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처럼 후기 기독교 사회로 접어들어 있는 한국의 교회, 그 가운데서도 한국의 장로교회들을 다시 개혁할 방법은 무엇인가? 얼핏 한국의 교회들을 망치고 있는 자들이 목사들이니 이제는 신자(소위 평신도)들이 나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의 교회들을 망친 목사가 회복되고 개혁되는 것만이 한국의 교회들이 개혁될 수 있는 길이다.

이와 관련하여 역시 프랑스 신앙고백은 제25조에서 이르기를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동참했으므로, 그리스도의 권위로 세워진 교회의 질서는 신성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 없이 교회는 존속할 수 없다. 목사의 직임은 무리를 지도하는 것으로, 정식으로 청빙되어서 그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때 우리는 마땅히 그를 명예롭게 대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편이나 하위 수단에 매이지 않으시지만, 다만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을 좋게 여기신다.”고 했다. 그런즉 교회의 존립과 개혁, 그리고 회복과 부흥에 있어 정식으로 청빙된 목사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다.

최근 한국의 여러 장로교회들에서 장로교회의 교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목사들의 관심이 부족한 실정이다. 산발적으로 특강 강사의 강의와 신자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교리를 공부하는 경우가 있지만 무리(회중)에게 교리를 지도하는 것은 분명 “목사의 직임”이니, 교리를 배우고 습득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목사의 지도 가운데서 이뤄짐이 마땅하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목사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들을 바른 교리(자신이 속한 교단의 신앙고백에 맞는 교리)로서 지도하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목사들이 늘어갈수록 비로소 교회인 예배당도 늘어날 것이니, 그 때야말로 안 나가는 성도들이 회중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이루는 진정한 회복과 부흥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신앙고백 제25조는 그 말미에 이르기를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거짓말로 말씀 설교와 성례전 시행을 완전히 폐지하고자 하는 모든 환상가들을 혐오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환상가들이란 일차적으로 재세례주의자들과 열광주의자들이지만, 오늘 우리들의 시대로 보자면 교회에 안 나가고 모니터에서 나오는 설교를 듣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비롯하여, 헛된 설교와 화체설에 가까운 성찬을 시행하고 있는 목사들과, 온갖 사도적 은사들을 추구하는 신사도운동의 사역자들이 전부 “거짓말로 말씀 설교와 성례전 시행을 완전히 폐지하고자 하는” 혐오스런 “환상가들”인 것이다.

결국 목사직과 예배의 진정한 회복이야말로, 후기 기독교 사회로 들어서는 교회들을 되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인 것이다. 그런 예배의 회복에 헌신하는 목사가 없다시피 하므로 교회가 존속하지 못하며, 그처럼 교회가 존속하지 못하므로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안 나가는 자들로 전락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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