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다니엘 주석 3강, 4강

칼빈 다니엘 주석 3강, 다니엘 1:9-17

1. 다니엘은 정복자의 환관장에서 자기 상태를 말했다(8절). 정복자의 관료는 포로의 요구를 기쁘게 경청했다(9절). 유다를 멸망케하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었다. (참고로 은혜와 긍휼은 (헤세드와 라함)으로 favor and compassion이다. 우리는 은혜에서 favor와 grace를 구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헤세드는 대체로 ‘인애(仁愛)’로 번역하고 있다.) 최소한 훈육생의 요구를 최고 관리자가 기쁘게 경청하고 토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피할 길을 주신 것이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께서 택자의 마음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마음까지 변화시킨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실수가 있고, 모르는 사람도 옳을 수 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소가 뒷걸음으로 쥐를 잡기도 한다. 하나님의 일은 확률이 아니라 충성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환관장에게 왕의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상태였다.

2. 그러나 환관장은 왕 느부갓네살에게 인정받음에 매달린 사람이었다(10절). 흠도 없이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했다. 그래서 다니엘의 건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지만, 왕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제일목표였다. 신하(臣下)의 바른 자세이다. 다니엘은 환관장의 말을 들을 때 적당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다.

3. 칼빈은 환관장과 타협이 되지 않아서 환관장의 청지기(steward)와 다시 타협한 것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환관장과 타협이 잘 되어 감독과 세부 사안을 협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칼빈처럼 해석하면 실패한 시도에 낙담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시도한 것이 되고, 후자로 해석하면 결정된 사안을 시행하는 것도 많은 지혜가 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상급자가 거부한 것을 하급자가 독단으로 시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다니엘은 감독에게 말했다(11절). 우리 번역은 주어가 두 개가 있어 명료한 이해가 쉽지 않다. ‘함메르차르’, 우리말에 ‘감독’은 Geneva(1159), KJV(1611)에서는 ‘Malasar’라는 인명으로 번역했다. 다른 영역(英譯)에서는 overseer, guard, supervisor, steward 등으로 번역했다. 칼빈은 as Meltsar를 청지기로 제시했다.

다니엘은 모르게 행동하거나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다니엘은 고위공직자들을 상대하는 지혜를 익혔다. 고위공직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 상태가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인도받는 백성에게 정직은 최고 잘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다니엘은 자기만 이익을 보려고 제언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제언이었고, 환관장과 그의 청지기에게도 피해가 되지 않을 방안에 대한 제언이었다. 다니엘은 그러한 방안을 감독(환관장의 청지기)에게 제언했다.

5. 그것은 열흘 동안 채식과 물을 구별해서 시험을 삼아 보는 것이다(12절). 그리고 그 기간 후에 다시 음식 식단을 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13절). 환관장의 청지기는 다니엘의 제언을 기쁘게 수용했다. 열흘이 지났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의 안색이 더 좋았다(15절). 채식을 한 사람이 산해진미를 먹은 사람보다 안색이 좋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칼빈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유대를 회상하며 애도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더 안색이 좋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얼굴이 더 빛나고 윤택해 졌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밀한 복(the secret blessing of God)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가 하나님의 섭리를 맹신하면서 경륜했다고 보는 것에는 아쉬움이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매우 정확한 식단과 체계적인 관리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른 포로 훈육생들은 산해진미에 묻혀 즐기며 방종했다고 본다면 좀 더 합리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얼굴의 안색은 채식과 산해진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관리에 있다. 결국 환관장의 청지기는 모두가 섭취하는 음식과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으로 전환해 버렸다(16절).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생활양식을 기독교적으로 바꾸는 것이 탁월한 성품이다. 생활양식이 그리스도인을 만들지는 않지만, 기독교화된 문화에서 그리스도인의 덕이 나타난다. 기독교 사회인 유럽이 탈기독교 사회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이 힘든 삶을 산다고 한다. 사회의 한 양식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양식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주 하나님을 섬기며 정진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사회에 정착시키실 것이다. 환관장의 청지기가 채식으로 변환시킨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안전과 탐욕의 방편이었다.

6.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의 산해진미를 거부하고 채식으로 전환한 것은 그들의 지혜와 담력이 아니었다. 다니엘은 비록 포로로 끌려 왔지만, 징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도 징계하시지만 징계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기 백성을 살리는 방편은 독생자께서 직접 오셔서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고난 속에서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강렬한 기대를 증폭시켰다. 그 후에 올 어둠을 이길 강력한 믿음이 시날 땅과 예루살렘에 필요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경배하러 예루살렘, 베들레헴으로 오기까지 했다.

7.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삶에서 적들과 원수들에게 둘러 쌓여있고, 새롭게 덫을 놓기에 바쁜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불경건한 자들에게 긍휼을 주셔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옵소서. 우리는 주께서 하늘에 예비하신 영생의 안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길을 정진하겠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칼빈 다니엘 주석 4강) 다니엘 1:18-2:2

1. 17절 번역은 개역과 개역개정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개역)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이고”, (개역개정)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이다. 개역개정 번역이 좀 더 잘 구별한 경우이다. 개역 본문으로 이해로는 네 친구에게 네 가지 은사가 주어진 것처럼 느껴지는데, 두 가지 은사이다. 네 친구에게 주어진 은사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과 서적을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knowledge, and understanding in all learning and wisdom).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니엘이 선지자 직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세 친구보다 이상과 꿈을 깨달을 수 있게(understanding of all visions and dreams) 해 주셨다(17절). 칼빈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세 친구와 구별된 선지자로 세우신 것으로 이해했다. 다니엘은 선지자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환상과 꿈을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지식을 받았다. 간혹 그리스도인들 중에 특별한 직무를 사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은사는 받을만한 자가 받는 것이다. 사모하는 것을 너무 과도한 갈망은 은사를 탐욕으로 바꾸는 죄가 된다. 일반의 진솔과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의 덕을 수행할 수 없다. 어떤 탁월한 성품을 계급적이나 상급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2. 3년의 기간이 되었을 때에 느부갓네살은 훈육생들을 모두 소집했다(18절).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시험했고,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두각을 나타냈다(19절). 왕은 얼굴 안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문과 지혜가 중요했었다. 네 사람의 지혜와 총명(wisdom and understanding)은 바벨론의 박수나 술객보다 10배나 더 탁월한 수준이었다. 정복자 느부갓네살은 정복된 청년들의 탁월한 학문 실력에 유대인을 멸시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서 정복자를 정복하셨다.

3.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었다. 단 10장에 등장하는 환상은 고레스 3년에 있었던 것이다. 고레스 원년은 포로 귀환을 선언한 때이다. 느부갓네살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 한 뒤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로로 시날까지 인도했다(BC 605년. 597년(에스겔), 587년). 그러나 그 왕국이 멸망하고 고레스 왕 원년에 포로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BC 537년, 2차 458년(에스라), 3차 444년(느헤미야)). 다니엘은 예레미야에게 주신 바벨론 유수 70년을 바벨론에서 모두 감당한 선지자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고위직 관료는 아니었다. 벨사살의 잔치에 다니엘은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단 5:13). 다리오가 통치할 때에 세 총리 중 한 사람이었다(2절). 다리오는 바벨론 왕국이 아닌 메데(Media) 왕국의 왕이었다(단 5:31, BC 539년). 고레스 62세에 부마(駙馬) 고레스의 바사(Persia)와 함께 바벨론을 정복했다. 고레스 원년은 메대와 바사가 통합한 때이다(BC 537년).

4. <다니엘 2장> 칼빈은 다니엘 2장에서 다니엘이 선지자 직무를 감당할 현장을 보여준다고 제시했다. 느부갓네살이 자기 꿈을 알려주지 않으며 꿈을 해석하라고 요구했고, 다니엘이 마지막에 간청해서 알려주고 해석했다(단 2:14-16절).

5. “느부갓네살 2년”은 성경 난제이다. BC 605년 뒤 2년은 BC 603년으로 3년 시험과 시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밀러(Miller)는 실제 통치 기간으로 보아 BC 602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해석하며 3년을 맞췄다. 칼빈은 아버지 느부갓네살과 아들 느부갓네살로 이해한다. 아들 느부갓네살(재위, BC 604-562년)이 완전한 왕으로 통치한 2년 이라고 제시했다. 16세기 칼빈이 반박했던 해석은 아직까지 유효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느부갓네살은 꿈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전능을 보면서도 예루살렘을 무참하게 정복하며 파괴했다.

6.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어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1절). 그런데 정복자는 매우 특이한 주문을 했다. 그것은 바벨론의 박수, 술객, 점쟁이, 갈대아 술사들을 불러 자신이 꾼 꿈을 알아 해석하라고 명령한 것이다(5절). 희한한 꿈을 꾼 느부갓네살은 더 희한한 명령을 했다. 갈대한 현자들은 왕의 명령이 부당하기 때문에, 다시 꿈을 내용을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7절).

세계적인 정복자가 한 밤의 꿈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1절). 칼빈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근거로 꿈에 대해서 제시했다. 먼저 인간이 꿈이 생각나면 해석하려는 자세이다. 꿈의 원인은 생각이 계속 연결되어 잠을 잘 자지 못하기 때문이라고(slumber) 했다. 꿈은 정신과 육체와 관계되어 있다. 그럼에도 꿈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 칼빈은 시저 부인인 칼퍼니아(Julius Caesar’s wife Calphurnia)의 꿈에 시저가 살해되는 것을 본 것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투스도 꿈을 꾸고 파르살리아 전투(반란)이 일어날 무렵 자리를 떠나기도 했다. 칼빈은 이런 꿈 이야기를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꿈이란 신비한 현상에 대해서 지시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꿈에 대해서 잘못 가르쳤는데, 꿈을 지적 영역이 아닌 감정 영역으로 분류했다. 그래서 우연성으로 분류하고 이성이 없는 피조물도 꿈을 꾼다고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꿈과 하나님의 연관성을 전혀 부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꿈이 다이모네스(Daimones)에서 비롯한 것으로 제시한다. 다이모네스는 플라톤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천사에 상응하는 것으로 인간 영혼의 기원으로 보았다. 칼빈은 철학자들의 개념이 얼마나 성경과 배척되는지를 제시했다. 아네테 아카데미 생도였던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반박했다. 키케로는 꿈에 신적인 성격을 인정했다. 키케로는 오히려 꿈을 신적인 것으로 자체했기 때문에, 칼빈은 그러한 개념에 대해서 거부했다. 모든 꿈이 신적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꿈이 신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divine agency in dreams), 자기의 모든 인적 자원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2절). 칼빈은 느부갓네살의 꿈에 대해서 왕이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해석할 수 없었다고 제시했다. 즉 너무나 강령한 꿈인데 기억나지 않았고 해몽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황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세계의 정복자도 한 밤의 꿈 때문에 당황했다. 정복자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선지자, 다니엘뿐이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악인도 자기 도구로 사용하신다. 느부갓네살에게 주신 꿈은 다니엘의 등장을 선언한 것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 사람은 아는 것이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를 아는 방법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 필자는 소경인 내가 소경인 인도자를 분별하는 법을 연구한다. 그것은 소경인 나에게 공포를 부여하지 않고 달콤발림을 하지 않고 평안을 주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평안은 오직 하나, 주의 이름 복음이 들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주신 말씀처럼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가 나의 선생이다. 많은 사기꾼들이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며 마음에 파도를 일으킨다. 풍랑이 이는 바다나 꽁꽁 언 바다에서는 마음의 배를 보내지 말자.

7. 칼빈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완전한 은사나 다른 사람보다 나은 은사를 주신 것이 아니라, 각각에게 은혜를 따라 은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성으로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절제하고 겸손하여 분수에 합당하게 정진하며 참되고 바른 지식을 이루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속의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오직 참 지혜를 주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일생을 영광과 헌신과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나의 몸을 주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될 수 있도록 복을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경태 목사

螢藍書院 五恩 高炅兌. 형설청람(螢雪靑藍), ex fide in fid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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