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 김경남 목사(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 목사는 서울대 법대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등을 역임하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I. 방황 속에서 길을 찾다. 

1972년 5월 어느날 고 나병식(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 3년)이 동숭동 서울대학교 법대 도서관 앞으로 필자를 찾아 왔다. 당시 필자는 1971년 5월 <서울대생 신민당사 난입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심에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된 후, 1년 가까이를 "개천의 용"이 되기 위한 사법고시 준비와 편모와 세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아르바이트(과외지도)에만 매진하려고 굳게 결심하고 집과 도서관, 그리고 과외제자의 집만을 오가고 있던 터였다.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은 계속되는 학원사태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학생회 간부들 150여명을 제적에 처하고, 그 중 40여명을 강제입영시킴과 동시에 '후진국사회연회'(약칭 '후사연')등 이념써클들을 해산시킨 바 있다. 나병식은 이런 상황에서 서울제일교회의 방하나를 빌어 모이고 있는 '후사연'의 세미나에 함께 참여하자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후사연' 교양과정부 회장(종합써클이었던 '후사연'은 각 단과별 대표가 있었다)을 맡았던 책임의식도 있고 그동안 만나지 못한 회원들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하여 그 다음 일요일에 나군에게 이끌려 서울제일교회의 '후사연' 공부모임을 나가게 되었다.

서울시 중구 오장동 중부시장 한구텅이에 짓다 말아 보기에도 을씨년스러운 4층 붉은 벽둘건물의 서울제일교회 2층 당회장실 입구의 어둠컴컴한 3평정도의 회의실이었다. 오후 2시쯤 모인 '후사연' 공부모임(?)에 앉아 있는 7-8명의 젊은이들 가운데 '후사연' 회원은 나병식과 강영원, 박원표, 황인성 4명이었다. 필자는 나병식에게 기만당한 것같은 허탈한 마음을 억누르고 정신차려 보니 그들 외에 귀공자 타입의 50대초반의 어르신과, 30대의 청년(?)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분들이 필자의 운명을 바꾸어버린 박형규목사님과 권호경 전도사님이셨다.

동경신학대학을 졸업하시기 전에 부산대 철학과를 졸업하신 때문이었던지 여러 사회과학 분야에도 정통하신 박목사님은 사회과학 위주의 '후사연' 공부모임의 훌륭한 지도교수가 되어 주셨다. 연구모임이 끝난 후의 후속 친교모임에도 목사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셨다. 대학에 들어간 후, 특히 '후사연'에서 공부를 하고부터는 그만 두기는 하였지만,  초등학생 시절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회와 합동측 교회들을 전전하던 필자의 (성직자는 성경 밖에는 모른다는)보수적 목사관으로서는 경이가 아닐 수 없었다.

'후사연' 세미나 소식을 듣고, 대학 이념써클  해체 이후 세상을 올 바르게 보기위한 참 지식에 목말라 있던 학생들이 매년 끊이질 않고 동참하게 되었다. 신해수ㆍ이미경ㆍ김은혜ㆍ송백희ㆍ정인숙(이상 이화여대 새얼), 차옥숭ㆍ고 박혜숙(이상 이화여대 파워), 강정례ㆍ백미서(백승연)(이상 이화여대 탈춤반), 신철영ㆍ김희곤ㆍ최준영(이상 서울대 공대 산업사회연구회) 등등.

그런데 '후사연' 연구모임이 시작된지 6개월쯤 지난 어느날, "그분"은 "이제 성경공부도 해 보지 않겠나?" 하시는 것이었다. 드디어 목사의 본색이 들어냈다고 생각한 필자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목사님은  천당이 있다고 믿으십니까?"하고 "그분"을 조롱하듯 물었다. 그런데 "그분"은 특유의 그 지긋한 미소를 지으시며 "죽어보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라는 보통 목사라면 할 수 없었을 대답을 하신 것이었다.

고 박형규 목사와 서광선 전 이화여대 교수

이에 "당신도 목사냐?"라고 비웃듯 물으며 뛰쳐나온 필자를 뒤따라 나온 권호경 전도사님은 "자네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자네를 붙들지는 못하겠네."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위로의 말인지 약올리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이 말을  뒤로하고 '서울제일교회 공부모임'과 작별을 고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달 여가 지나자 필자는 일요일 그 시간만 되면 그 모임과 그 얼굴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안절부절 못 할 지경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필자가 왜 그랬었는지는 필자 자신도 알지 못하였다. 단지 그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할 수 밖에....

"그곳"으로 돌아 간후 필자는 "그분"으로부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역동적인 하나님"을 만났다. 그분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해서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임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서울제일교회 대학생회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졸저 『당신들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동연, 2015. pp.235-248 참조 바람.)

묘지 앞에서 장남 박종렬목사

II. "그분"을 따르고자 했던 삶

1971년 사법파동으로 말미암아 법관이 되는 길만이 정의를 이루고 참되게 사는 길이라는 오랜 믿음이 깨어져 좌절하고 있는 필자에게 "그분"은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그분"의 삶과 같은 삶을 사는 목사가 되는 길이었다. 1974년 3월 필자는 "그분"의 보여주신 대안을 따르기 위해, 한국신학대학 신학과 3학년에 학사편입하였다. 그해 4월 "그분"과 함께 "전국민주ㆍ청년ㆍ학생 연맹사건(약칭:"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되어 12년 징역이 확정되었다가 익년 2월 "그분"의 뒤를 따라 석방되었다.

1976년 4월부터 1978년까지 "문교부(현 교육부)부의 명령에 따라 불가피하게 제적을 하지만 목사가 되려고 신학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신학공부를 할 기회를 박탈할 수는 없다"고 하여 설립된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위탁생과정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는 동시에 "그분"이 위원장이셨던 '서울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약칭 '수도권': 총무,권호경,빈민선교) 간사로서 서울 중랑천 빈민지역 선교를 하였다.

1978년 7월 "수도권 간첩단 사건"으로 "그분"과 함께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두달 가까이 불법 구금당했다가 "그분"을 구치소에 남겨두고 석방되어 "그분" 뜻에 따라 설립된 '서울제일교회 형제의 집'의  책임자로서 중부시장 노동자 형제ㆍ자매들과 동거동락하였다. 

1981년 목사 안수를 받고 "그분"의 뜻에 따라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약칭 '사선' : 총무 권호경, 신구교 사회선교단체 협의체)의 실무간사, 그후 권호경 목사 후임으로 총무 직분을 맡다. 1986년 5월-1991년 1월,  "그분"의 뜻에 따라 '한국 민주화를 위한 세계기독교 민주동지회'(약칭 '민주동지회. 대표; 고 김관석, 당시 KNCC 총무) 동경자료센터 관장의 직분을 맡았다. 1991년 2월부터 1998년 4월까지 "그분"의 뜻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 권호경)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직분을 수행하였다.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전국은 마치 민주화가 곧 완성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하여 전국이 축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여 인권옹호를 한다고 하자 필자는 민간차원의 기구에 불과한 KNCC 인권위원회의 존재는 무의미한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는 것은 마치 철밥통을 지키겠다는 것 밖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필자가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직을 사직하려 한다 소식을 전해들고 허병섭 목사가 찾아왔다. 그는 하월곡동 산동네 빈민촌에 동월교회를 설립하여 빈민선교를 하며 '수도권' 3대 총무를 역임하다가 1년 전에 목사자격증을 반납하였다. 그는 전북 무주군으로 귀농하여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닮은 삶을 살아오신 "그분"의 닮고자 애써 온 "동월동 예수"라고 불리우는 분이다. 필자가 존경했던 빈민선교의 선배였다. 허선배는 필자에게 "김목사에게 하나님이 아껴 놓으신 다른 소명이 있는 것 같네."고 말을 꺼낸 후, 자기가 귀농하여 살고 있는 마을에서 새롭게 시작된 대안학교 건립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인권위원회가 거액의 변호사비 등 정치범 지원사업으로 말미암아 NCCK 내에서 가장 재정규모가 큰 이유가 해외교회들의 지원 때문인데도 마치 사무국장인 필자의 모금능력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서 허선배가 그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이었다. 삼고초려 끝에도 그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는 필자에게, 잔금 지불할 능력도 없이 대안학교 설립을 위한 꿈만 가지고 그 마을의 폐교를 계약해 놓고 잔금걱정을 하고 있는 교사들을 만나 그들의 꿈이야기를 들어보기나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꿈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자신들의 철밥통같은 기득권을 다버리고 오로지 고질적인 우리나라의 교육의 현실을 바꾸자는 염원 만으로 대안학교를 설립하려는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우시는 "그분"처럼 바보스러기까지 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이 꿈을 들으셨다면 "그분"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나는 목사의 자격이 있는가?하고 자문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돕기로 결심을 하고 그들과 함께 하여 대안학교 설립을 위한 전국적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푸른꿈"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땅의 참교육을 바라는 많은 양심적 분들의 참여와 지원으로 1998년 11월 꿈만으로 시작된 '대안학교 푸른꿈 고등학교'가 마침내 설립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그 학교가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 잠시 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2002년 6월부터 2005년 4월까지 필자는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ㆍ사업본부장의 직책으로 이사장이셨던 "그분"을 모시었다. 또 2005년 4월부터 2009년 3월까지 "그분"이 설립에 앞장 서셨고 이사장직을 역임하셨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약칭 기사연) 원장직을 역임하였다.  

장남 박종렬 목사, <어는 돌맹이의 외침> 유동우, 박형규 목사.

II. 나가며

이상은 1971년 처음 만나 뵌 때부터 "신앙의 아버지" 로 모셔 온,  이 땅의 민주화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반평생을 바치신, "그분" 뒤를 따라 살려고 노력해 온, 지난 40여년의 필자의 삶의 고백이다. 필자는 "그분"이 필자의 이런 삶을 어떻게 바라 보셨을지 알길이 없다. 어느 때인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행태들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때, 목사가 되려고 한 것을 후회한다는 필자를 향해, "그분"은 특유의 그 미소만 보이실 뿐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 곁에 안식하고 계실 "그분"을 뵐 날까지 제가 앞으로의 여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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