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틴 루터의 슈말칼덴 신조(1537)와 대·소교리문답(1529)에 나타나는 교회의 특성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하고 타락한 면면을 개혁하고자 한 종교개혁의 상징적 인물인 말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이뤄진 개혁의 진전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루터에게서 가장 잘 개혁된 신학을 찾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오히려 루터교회(Lutheran Churches)라 불리는 교파를 형성했을 만큼 상당히 다른 진전을 이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다르면서도 엄밀한 의미에서 개혁된 신학과도 다른 루터의 신학내용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그의 신조와, 특히 그의 교리문답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교리문답을 살펴보는 것은 루터교회를 통해 구현되고 실천된 그의 신학의 실상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슈말칼덴(Schamlkalden) 신조가 교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교계주의’(hierarchy)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여러 제도들에 대한 진단과 해독(antidote)으로 시작하여, “우리는 그들(로마 가톨릭교회)을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다. 또 그들은 실제로 교회가 아니다.”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해 이르기를“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 즉 거룩한 성도들과 “그들의 목자의 소리를 듣는 어린 양들”(요 10:3)이라는 것……교회의 이 거룩함은 그들이 생각해 낸, 성경에도 없는 예전의 예복, 삭발, 긴 두루마기나 그 밖의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올바른 믿음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과 올바른 믿음에 있다.”는 문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한편 “거룩한 성도들”로서의 교회에 대한 고백과 그 교회의 거룩성이 “하나님의 말씀과 올바른 믿음에 있다.”는 슈말칼덴 신조의 문구는, 이미 그보다 앞서 사용된 루터의 소교리문답(1529)과 대교리문답에서 연원하는데, 특히 소교리문답은 사도신조(Symbolum Apostolicum)의 성령에 관한 고백을 바탕으로 175문답에서 이르기를“거룩한 교회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뒤에 “거룩한 교회란 성도, 즉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교제함이며 모든 신자만이 이 교회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178문답에서도 “교회를 어찌하며 거룩하다고 칭합니까?”라고 물은 뒤에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서 거룩하게 지음받고 또한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교제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여, 역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연구회 회원)

루터가 교회를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그의 대교리문답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조, 곧 사도신조를 다루는 가운데서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대교리문답은 교회에 대한 언급을 성령에 관한 고백 가운데 하면서 “만일 누가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처럼, 성령이 나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어떤 방법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그 용례와 수단은 무엇일까요?”라고 물은 뒤에 답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죄의 용서를 통해, 육의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라고 했다.특별히 루터의 대교리문답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말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에서 ‘코무니오 상토룸’(communio sanctorum) 곧 ‘성도의 교제’에 해당하는 말입니다.”라고 하여 교제의 성격을 강조하는데, 특히 ‘교제’(communio)라는 라틴어 단어를 독일어로 번역할 때에 ‘공동체’(독일어: Gemeinde)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성도의 교제’라는 말도 독일어 용법으로는 ‘거룩한 자들의 교제’로서, 다시 바로 잡으면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 즉 ‘거룩한 공동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를 생각할 때에 ‘성령 〉 거룩성 〉 공동체’로서의 설명으로 되어 있는 루터의 교회관은, 소교리문답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교제”, 대교리문답에서는 “죄의 용서”를 강조함으로써 공히 공동체로서의 개념을 부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나중에 슈말칼덴 신조에서의 교회에 대한 설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믿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고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슈말칼덴 신조 제4조의 교황 제도에 대한 해독제(antidote)에서 “교황은 하나님의 법(jure divino),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전체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가 아니다.”라고 하는 부분과, “교황의 가르침을 성경의 가르침과 구별하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황의 가르침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교황의 칙령들이 보여 주듯이, 황제국의 이교적인 (로마의) 법으로부터 취한 것이며 세속적인 거래들과 법정의 판례들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교회의 의식들, 성의들, 음식, 어른과 아이들의 놀이, 황당하고 바보스런 일 등 무수히 많은 것들이 세속적인 가르침에서 따온 것이다. 이 모든 것들 중에 그리스도와 신앙과 하나님의 계명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 문맥 가운데서 교회와 관련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를 다소간 확인할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루터의 신학이 갖는 특성 가운데서 우리들은 아직 무르익지 못한, 혹은 충분하게 개혁되기 전의 초기적인 개혁신학의 일면을 루터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 위 내용은 4월 16일(월)로 예정된 "바른교회 바른목회 바른예배 세미나"(부산 엘레브선교센터 8층)에서 발표될 예정인 강의안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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