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광신대 신학과 3년)의 기독교강요 강독기

고은(광신대 신학과 3년)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었는데, 칼빈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칼빈이 성경(로마서 1-2장)을 근거와 당시 사회 상황을 보면서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우리시대 상황도 1세기 로마, 16세기 제네바나 다른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왜 최후의 심판에 대한 것과 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대항하는 지가 의문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떤 자세여야 할까? 성경은 인간을 존재를 창조주 하나님께서 먼지(흙)으로 창조하셨다고 제시한다. 창주조 하나님 개념에는 창조주 하나님께 피조된 인간 존재를 전제한다.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 인간과 교제를 허락하셨다. 그럼에도 창조주 하나님의 엄위에 두려움에 쌓이게 된다. 그런 나약한 인간이 왜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칼빈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람들이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항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에 항거하는 정신”을 즐거움으로 정의했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에 항거하는 정신은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불의와 폭거에 대한 항거여야 하고, 부패와 타락에 대한 항거여야 한다. 그런데 왜 창조주 하나님을 저항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할까? 창조주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선언하셨고, 성적 범죄를 엄격하게 규정하고 계신다.

인간은 왜 두려움을 느낄까? 인간은 스스로 두려움 속으로 들어갈 결단을 하는 독특한 존재이다. 두려움은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벌이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되었다.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는 두려움이 없이 살고 있었다. 선악을 알게하는 과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었고, 어디에서든지 잠을 잘 수 있었다. 옷을 입지 않고도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죄를 범하고 난 후에는 수고해서 일을 해야 하고, 집을 지어야 보호될 수 있다. 그리고 옷을 입어야 한다.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은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발생했다.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살 수 있다.

현대인들은 나약해서 두려움에 패배해서 각종 정신질환이 증가하고 있다. 우을증이나 공황장애는 일상적인 감기와 같은 수준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만들었다. 그것이 두려움을 즐기는 방법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호라티우스의 시구는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언일 것이다. 현재의 즐거움에 만족하려는 현세지향의 극치일 것이다. 좀 더 철학적으로 제시하면 현재에서 미래로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두려움을 즐기는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도 개발했다. 그리고 공원의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는 가장 쉽게 두려움으로 흥분할 수 있는 도구이다. 놀이동산의 기구들은 안전과 흥분을 동시에 주는 두려움을 즐기는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안전하다는 생각과 극한의 상황에서 두려움 체험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죄성이 악화될수록 두려움을 즐거워한다. “훔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빵이 맛이 있다”(바른성경, 잠언 9:17). 잠언 기자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몰래하는 행동의 두려움에서 즐거움, 죄악의 즐거움을 탐닉한다. 그래서 인간은 금지하면 할수록 그것을 더하려고 하는 탐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지면(죄가 일반화되면) 다른 두려움을 창안해서 죄의 즐거움을 탐닉(耽溺)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동성애 합법화를 교묘하게 차별금지법으로 제정하려고 한다. 동성애 혼인법이 제정된 서양에서는 수간(獸姦), 로봇 섹스 등이 이슈로 부각된다고 한다. 죄가 일상화되면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에, 더 큰 죄의 벽을 넘어서며 두려움을 즐기려는 것이다. 일상은 즐거움이 아니라 지루함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인간이 즐거움을 위해서 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그 죄의 기준은 하나님의 계명이고, 인류보편의식이다. 인류보편의식은 이제 성역 파괴로 결정이 났고(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1968년 프랑스혁명), 하나님의 계명만이 남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벽인 창조주 하나님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 두려움에 직면하면서 죄의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은 미친 듯이 돌진하고 있다. 돌진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저항하는 정신은 두려움의 표현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도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저항이 아니라 경배를 위한 두려움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피조물의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으로 해소해주셨다. 그래서 두려움의 주(主)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주의 보좌로 나간다. 두려움과 사랑이 결합된 경건을 이루어야 한다. 두려움에서 타락과 저항으로 가는 정신은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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