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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덕담】선한 양심은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해야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양심(良心)은 선악을 판단하고 선을 명령하며 악을 물리치는 도덕의식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거나 또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양심은 자기가 행하거나 행하게 되는 일, 특히 나쁜 행위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의 이러한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 그 자체를 오해 하게도 합니다. 양심의 기능이 선악을 판단하고 선을 명령하는 것이라면 그 양심은 절대적으로 선해야 합니다. 만약 양심이 선하지 못하다면 그 선하지 못한 양심은 선악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양심이 선한지 악한지를 판단하려면 선악에 대해 양심보다 더 옳고 권위를 지닌 무엇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양심은 생득적인지 후천적인지도 단정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근 하이데거의 철학이 윤리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 자신은 그 어떤 윤리학의 정립도 의도하지 않았고 자기의 철학에 대한 윤리학적 혹은 도덕적 오해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그의 사유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여겨 그 같은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 철학의 윤리학적 함의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단초가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비본래적 자기로부터 본래적 자기로 회귀해야 하는데, 그러한 회귀의 가능성과 조건을 양심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양심을 도덕성의 실존적 가능 조건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사용한 양심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실존방식을 본래적과 비본래적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비본래적이 비도덕적이라고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두 가지 실존방식에는 아무런 도덕적 가치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다는 것은 일상성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도덕적 일탈과 타락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본래적이라는 말은 오히려 비철학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실존에서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타인과 더불어 일상의 평온을 즐깁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남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남들이 행위 하는 대로 행위 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 경우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 하는 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당연히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영향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거의 타인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타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본래적 존재가능의 조건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상투성에 빠져 있고, 그리고 그것이 나의 실수나 잘못 때문이 아니라면, 철학 없는 일상의 상투성으로부터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가짜 자기로부터 진짜 자기로 살겠다는 결단과 선택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선택과 결단을 가능케 하느냐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고, 또 제기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는 진짜 자기 존재 가능을 입증하는 것이 양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가짜 자기를 인식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결단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양심은 ‘어떤 것’을 이해시켜 준다고 보았습니다. 양심은 타인의 지배를 벗어나서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도록 깨우치고 이해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는 양심을 인간 존재가 자기를 이해하는 본래적인 방식에 대한 이름으로 파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존재와 양심의 심판적 성격과 능력과 기능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고, 양심의 출처와 내용도 다양합니다. 양심의 현상은 침묵의 언어를 통해 자기를 드러냅니다. 양심은 자신으로 하여금 일상성에 빠져 진짜 자신을 상실 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부터 탈출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양심은 언제나 침묵의 방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으로 양심의 소리를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더 나쁜 것은 고의적으로 악을 행하면서 양심의 소리를 왜곡하여 악행을 정당화 하는 경우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이야기 할 때 말하는 양심과 듣는 존재는 동일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는 양심과 그 소리를 듣는 존재가 동일하다면 양심의 소리가 정당하다는 근거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 자신도 양심의 역할을 “우리 자신에 의해 계획되지도 않고, 준비되지도 않고, 우리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지도 않고 ... 우리의 기대와 의지에 반해서”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은 양심의 소리와 그 소리를 듣는 존재를 동일 존재라고 한 앞의 주장과 모순을 일으킵니다. 차라리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지향하도록 부여한 기능이라고 믿고 인정하는 것이 좋을 텐데 그의 이성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양심의 존재 규정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끔찍한 일상에로 침잠하는 인간을 무에로 던져진 존재라고 서술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양심의 기능은 책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하더라도 양심은 끝없이 본래적이 아닌 것이나 바르고 정당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자신에게 죄책감과 더불어 책임감을 일깨웁니다. 전통적으로 양심 개념은 언제나 죄와 관련하여 논의되어 왔습니다. 철학은 죄를 존재론적 불충분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성경은 죄를 하나님께 대항하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죄란 자신에 대한 책임 문제이고 성경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께 대한 책임 문제입니다.

그는 인간이란 스스로 선택한 존재가 아니라 던져진 존재이고 양심의 소리는 결국 자기의 소리이지만 양심은 자신의 의지영역 밖에 놓여 있어서 우리의 의지와 기대에 역행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인간 존재와 양심 이해는 철학적 사유의 영역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약과 혼란을 일으키지만 성경은 너무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인간 존재와 양심 등에 대하여 탐구하여 진실에 비슷하게 접근을 하므로 거짓된 자기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름 유익을 주기도 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철학은 참 지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양심을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세례와 관련지어 설명합니다. 아마도 세례를 양심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은 베드로가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종교 의식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례를 가리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3:21절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는 세례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부정의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긍정의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부정의 방식은 세례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즉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은 육체적 욕망을 가리키는데, 모든 욕망은 제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오해로부터 금욕적인 신앙의 형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금욕주의 쿰란 공동체가 있었고 중세 수도원 제도도 그런 경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 오해는 계속되고 있는데 베드로는 이 문제를 처음부터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욕망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성화에 대한 것입니다. 세례 자체가 성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이나 성화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사람의 인격이 순식간에 변화되거나 성화가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므로 세례의 어떤 효능을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베드로가 신자의 실존을 나그네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나그네는 끊임없는 실존적 도전에 직면하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의 신앙이 어느 순간에 나락으로 추락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에서 세례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하였습니다.

‘양심’이란 헬라어로 쉬네이시스 συνειδησις입니다. συνει는 ‘함께’(συν)라는 전치사와 ‘안다’(οιδα)의 합성어입니다. 헬라어에는 ‘안다’를 의미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인데, 이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다른 하나는 오이다(οιδα)로 내적이고 주관적인 의식, 즉 체험적 앎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양심이란 함께 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옮고 그름을 아는 것이 양심입니다. 무엇을 알려면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아직 미성숙한 어린아이나 정신박약아에게는 양심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란 혼자 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는 것입니다. 함께 아는 것이란 독단으로 혼자 아는 것과 대조됩니다. 교회에는 공동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와 신학과 바른 전통도 공동으로 아는 것입니다. 국가나 사회나 어떤 집단도 공동으로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 공동의 지식을 알고 따르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지식은 역시 불완전합니다. 헤켈은 양심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첫째 자기와 ‘함께’아는 것, 둘째 타자와 ‘함께’아는 것, 셋째 절대자와 ‘함께’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헤켈이 양심을 절대자와 함께 아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는 양심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선한 양심’이라고 하여 모든 양심이 다 선하지 않다는 전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무조건 선하거나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무엇을 했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법도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고 하지만, 옳지 못한 양심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양심에 거리낌 없이 했다고 해서 정당화 될 수가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가난한 대학생인 라스콜니코프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고 돈을 강탈합니다. 그는 그 노파를 죽이면서, 그 노파는 사회에 해충과 같은 존재이기에 죽여도 괜찮을 뿐 아니라 죽여야 마땅하다고 자기 행위를 정당화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양심이란 절대 선하거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양심도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선한 양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철학자나 윤리교사들은 양심을 교육이나 계몽으로 깨우쳐 갖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양심이 교육이나 계몽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주시는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이 인간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양심도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예수님의 부활과 구원과 세례와 연결해서 설명하였습니다. 혼돈과 가치의 무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선한 양심을 구해야 합니다. 선한 양신의 원천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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