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4:28, 2014년 10월 5일, 부산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오늘 2명의 형제가 학습을 받았는데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과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이제부터는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서약이며 하나님 편에서는 그러한 서약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개인과 공동체에게 은혜를 베푸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찬과 더불어 주께서 교회에게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례입니다. 거룩한 예식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은혜의 방편으로 허락하신 거룩한 예식이 성례인데 이 말은 원래 로마군대가 그들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사크라멘툼’이라는 서약의 예식에서 사용했던 단어를 차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약의 예식이 재미있습니다. 로마군인이 서약, 사크라멘툼을 통해 충성을 맹세할 때 평상시에 입었던 자신의 사복을 벗고 군인의 신분을 상징하는 군인의 제복을 입습니다. 그렇게 옷을 바꾸어 입으므로 이제 그 사람은 더 이상 일반시민이 아니라 로마황제의 특별한 군인이 되었다는 것을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었습니다. 그것이 세크라멘툼이었고 초대교회가 이 용어를 차용해서 세례를 sacrament, 성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행했던 세례식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세례 받을 사람은 공회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서 평상시에 입었던 자신의 옷을 벗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불신의 삶을 뒤로 하고 의절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는 물속으로 잠깁니다. 세 번 물속에 잠기는데 완전히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자신의 삶을 수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게 올라와서는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크라멘트, 세례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성도의 마땅한 삶을 권면할 때 바로 이 세례의 이미지인 벗고 입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4:22-24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현재형처럼 되어 있지만 원래의 뜻은 과거시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참된 신앙고백을 했을 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의 의도는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삼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고 거룩한 세례를 받았다면, 과거에 이방인으로 살던 죄와 불신의 허망한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충성스럽게 살겠다고 세크라멘툼의 서약을 하고 새사람의 옷을 입었다면 마땅히 새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세례를 받은 새사람다운 삶의 권면이 25절부터 5:14절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학습 세례를 받은 2명의 지체와 그 서약에 함께 동참하면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확인했던 모든 주의 백성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충성 서약, 세크라멘툼 한 자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합당한 삶이 무엇입니까?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며 분을 내되 죄를 짓지 않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도둑질 하지 말라로 연결되는데 주의할 것은 이 모든 요구가 25절의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는 근거 하에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이죠? 새사람의 삶은 지체를 향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옛사람의 삶을 요약하면 죄에 속한 삶인데 이것은 오직 자신만을 향한 삶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지체를 향하지 않고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 죄입니다. 삶의 방향이 오직 자신을 향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세크라멘툼한 자들은 바로 그러한 자기중심성의 삶의 옷을 벗어 던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었습니다. 새사람의 옷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지체를 향한 삶입니다. 자신을 향한 삶에서 지체를 향한 삶으로의 전환, 이것이 회심이며 세례입니다. 회심이라는 말은 근본적인 돌이킴이란 뜻인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오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반응입니다. 자신에서 하나님에게로, 자신에서 이웃, 지체로의 방향전환이 일어납니다. 

그 방향전환의 결과는 거짓을 버리는 것, 분노를 조절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오늘 본문의 권면처럼 도둑질을 버리고 선한 일을 행하여 다른 사람을 도우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왜 거짓을 말합니까? 왜 속이고 과장하고 포장하고 감추고 숨깁니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왜 분노합니까? 많은 경우,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이익과 자존심에 손상이 왔을 때입니다. 전부 자기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도둑질 합니까?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도둑질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돈을 훔치거나 물건을 훔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모든 것이 도둑질입니다. 돈을 훔치던 시간을 훔치던 생각을 훔치던 그 무엇이든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 만드는 것은 모두가 도둑질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도둑질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상합니다. 지체가 타격을 입고 그 사람의 인생자체가 해를 입습니다. 지체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자기를 위해 지체를 깨트리는 심각한 죄입니다. 그래서 고전6:9-10절에서는 도둑질을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여러 가지 죄 중에 하나로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니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도둑질 하지 말라는 8계명을 해석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10-111문은 도둑질의 정의를 단순히 이웃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절도행위만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모든 시도와 그 동기가 되는 탐심을 도둑질의 범위에 포함했습니다. 그러므로 도둑질이라고 할 때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는 것도 도둑질로 포함시켜야 하며 자신의 것을 만족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는 마음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범주로 보신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한편 땀 흘려 벌지 않고 생기기를 바라는 모든 것도 도둑질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후반 절에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는데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상적인 삶의 원리들입니다. 땀 흘리지 않고 남이 주는 것을 얻어먹고 사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불한당이라고 하죠. 하나님은 성도의 삶이 불한당 같은 삶이 아니고 자기 손으로 수고해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삶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새사람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과 힘도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손으로 수고하는 것보다 거저 생기는 것이 더 좋은 사람들입니다. 천만 원을 버는 것과 천만 원이 생기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버는 것은 내가 그런 수고해서 그 수고의 결과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생기는 것은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 결과입니다. 내가 땀 흘리지 않았는데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좋아합니까? 버는 것보다 생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불한당을 좋아합니다. 죄인들의 한결같은 심성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그저 생기는 것은 마냥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면서 땀 흘리지 않고 빈둥빈둥 노는 것은 죄입니다. 도적질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그러합니다. 한 신자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갈 때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어떤 체험이나 누구의 도움으로 그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이 영적인 도적질입니다. 성도의 인격, 성도의 성품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을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고, 분노를 조절하며 다스리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영적전쟁을 통해 하나씩 우리에게 맺히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삶의 연단과 훈련을 거쳐서 허락되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외면하고 하루아침에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영적도둑질입니다. 40일 금식기도 한번 하고 40년 해야 할 인격의 열매를 거두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삶을 종교로 때우는 모든 것은 도둑질에 해당됩니다. 

영적으로도 자기 손으로 훈련하고 죄와 더불어 스스로 싸워서 마땅히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영적 실력과 능력을 구비해야 합니다. 기도로 뺏아오려고 하지 말고 성화의 과정을 통해 오래 참음과 견딤과 기다림으로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것은 한 순간에 급행으로, 속성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성으로 된다고 하는 모든 가르침은 정상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데 속지 마십시오. 우리한테 오면...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을 떠나서도 괜찮은 사람이 되려면 인생의 쓴맛, 단맛, 산전수전 다 겪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도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하물며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속성으로 해치우려고 해서 되겠는지요?

자기 손으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얼마나 정확한 지적입니까? 그러므로 도둑질 하지 말라는 이 권면은 우리의 직업에 대한 생각도 교정시키는 권면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직업은 단순한 생계의 수단이 아닙니다. 생계 수단을 넘어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해” 허락된 거룩한 통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생계를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빈궁한 자를 돕기 위해 일을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옛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만 일을 했고 자신을 위해서만 일한 결과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자기를 위해서만 일하지 않고 빈궁한 자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자기를 위해서만 일하면 그것도 도둑질에 해당된다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이런 삶을 위해 우리는 오늘 다시 세크라멘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살 수 없는 저희들입니다. 그러하니 도우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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