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헤럴드 제2종교개혁운동 시리즈

지난 2016년 12월 19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결과’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967만6000명(19.7%)으로 국내 종교 인구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위는 불교로 761만9000명(15.5%)이었고 3위는 천주교 (389만명·7.9%)가 차지했다. 개신교 인구가 국내 종교 인구 중 1위로 올라선 것은 10년 마다 시행되는 인구주택총조사 이래 처음이었다.

2005년도 개신교인구 861만명에 비하면 106만명이 증가했다. 불교가 같은 기간에 300만명, 천주교가 125만명 감소한데 비해 개신교의 증가는 놀라운 숫자이다. 아마도 신천지 등 이단종파의 증가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독교 신앙은 갖게 됐으나 교회는 나가려 하지 않는 가나안 신도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아무튼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도가 가장 많은 종교인으로 조사되었지만, 교회와 목사들의 신뢰도는 바닥이다. 임태수 박사(호서대 명예교수, 제2종교개혁연구소장)은 지난 3월 16일 동부교회문화대학 특강에서 한국 개신교의 부패지수가 높고, 개신교와 목사들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에 대해서 5가지 원인을 제시하였다.

1. 교회성장주의 신학

2. 믿음과 행함의 불일치

3. 말과 행동의 불일치

4. 지나친 명예추구, 사치, 성범죄

5.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본헤럴드는 창간 1주년에 즈음하여 <제2종교개혁운동 시리즈>로 임태수 박사의 글 “제2종교개혁 구원론”을 연재하고자한다. 임태수 박사는 한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Bonn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호서대학교 신학과 교수, 인문대학 학장, 한국구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편집자 주>

 

 

제2종교개혁의 구원론: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으로 구원-

                  임태수 박사(제2종교개혁연구소 소장‧호서대 명예교수)

 

머리말

한민족은 세계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계선교의 사명이요 제2종교개혁의 사명이다. 서구교회는 지금 텅텅 비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회들도 서구교회가 앓고 있는 죽음의 병을 앓고 있다. 이런 서구교회와 세계교회를 개혁하고 살릴 사명이 한민족에게 있고 한국교회에 있다. 그런데 이 세계적 사명을 다 해야 할 한국교회는 지금 병들어 있고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교회도 서구교회와 세계교회가 앓고 있는 병을 앓고 있다.

세계적 사명, 제2종교개혁의 사명을 받은 한국교회가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다.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죽음의 병을 이기고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한민족에게 맡기신 세계적 사명, 세계선교의 사명, 제2종교개혁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교회를 죽이는 병을 이기는 방법을 찾아내서 먼저 한국교회부터 치유하고 다시 살아나서, 그 치유방법으로 죽어가고 비어가는 서구교회와 세계교회를 살려내야 한다. 그 사명이 한국교회에 있다.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약속하신 사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21세기에 한민족에게 맡기신 이 중차대한 사명을 한국교회가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에서부터 제2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제2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마르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다”는 구호를 내걸고 성공한 16세기의 종교개혁을“제1종교개혁”이라고 부른다면, “제1종교개혁”을 넘어서고 보완하는 21세기의 개혁을 나는 1997년부터“제2종교개혁”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제1종교개혁”과는 달리 “제2종교개혁”은 “믿음과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신학을 구호로 내걸고 주장한다. 이 “행함 있는 믿음으로(fide cum opera) 구원”이 제2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이요, 이 구원론은 마태복음 7:21; 야고보 2:24 등 철저히 성경에 기초한 구원론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17,26). “행함 없는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을 내세우는 서구교회가 비어가고 죽어가고 있고, 한국교회도 병들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만”의 구원론은 이번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유병언의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가 주장하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선행은 구원과는 무관한 상급의 대상”이라는 구원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마태복음 7:21). “행함 있는 믿음”으로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행함 있는 믿음”을 한국교회가 가지고 철저히 실천하면 제2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맡기신 세계적 사명, 세계교회를 제2종교개혁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사명을 반드시 완수해야 하고 완수할 수 있을 것을 믿는다. 한국교회가 한민족에게 맡기신 세계적 사명, 세계교회를 제2종교개혁 사명을 완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를 살리고 개혁하는 일에 모두 기도해주시고 동참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믿음에는 한 종류의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두 종류의 믿음이 있으며,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의(義)에도 한 종류의 의(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의(義)가 있으며, 기독교인이 행해야 할 행함도 한 종류의 행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행함이 있다.

 

제1장 두 종류의 믿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하면, 한 종류의 믿음만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는 ‘행함 있은 믿음’(faith with works)이고, 다른 하나는 ‘행함 없는 믿음’(faith without works)이다.

1) 마태복음 7:21

마태복음 7:2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에 두 종류의 믿음이 나타나 있다. 하나는 행함 없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행함 있는 믿음이다.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를 항하여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루터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얻는다”는 구원론에 의하면 예수를 향하여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사람,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야 마땅하다. 그런데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주여 주여’ 하고 부르며 믿는 사람이라도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를 항하여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 있고, 반면에 구원을 얻지 못하는 믿음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믿음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다. 믿음 없이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7:21에서 믿음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믿음에 더하여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함을 마태복음 7:21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어떤 믿음이 구원을 얻고 어떤 믿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가? 구원을 위한 또 하나의 조건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행함 있는 믿음: 믿음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행함 없는 믿음: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행함은 구원의 또 하나의 조건으로 등장한다. 다시 말하면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은 ‘믿음과 행함’ 두 가지다. 루터는 구원의 조건을 ‘믿음’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마태복음 7:21에서 구원의 조건을 “믿음과 행함” 두 가지로 제시하신다. 그렇다면 누가 틀렸는가?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구원론과 달리, 구원의 조건을 ‘믿음과 행함’ 두 가지로 제시하신 예수님이 틀렸는가?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이 틀릴 리 없다. 틀린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루터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 한 가지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 두 가지라고 마 7:21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 믿음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행함 있는 믿음’과 구원을 얻을 수 없는 “행함 없는 믿음”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은 다른 성경구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2) 마태복음 7:24-27

마태복음 7:24-27에서 예수님은 산상설교 마지막에 집짓는 자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비유에서도 우리는 두 종류의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행함 있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행함 없는 믿음’이다. 이 두 종류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은 “나의 이 말 즉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24절)이요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다. 여기에서“나의 이 말 즉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주님의 산상설교의 일차적인 청중이 ‘제자들’(마태복음 5:1)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이 사람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는”집을 지은 사람, 즉 구원을 얻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믿음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도 “나의 이 말을 듣는 사람”(26절)이므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다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의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집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말은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짐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의 집은 무너졌다.

이 무너졌다는 말은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말이다. 두 사람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한 사람은 구원을 얻고, 다른 한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믿음 즉 구원을 얻는 믿음과 구원을 얻지 못 하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믿음이 구원을 얻고 어떤 종류의 믿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가?

행함 있는 믿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은 "나의 이 말을 듣는 사람”(24절) 즉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임과 동시에 “이 말을 행하는 사람”(24절)이다. 그래서 그가 지은 집은“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았다.”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다.

행함 없는 믿음: 이와는 반대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은 "나의 이 말을 듣는 사람”(26절) 즉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 말을 행하지 않는 사람”(26절)이다. 그래서 그가 지은 집은“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무너짐이 심하였다.” 구원을 얻지 못 했다는 말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오직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만 구원을 얻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그들의 행함 여부에 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믿을 뿐만 아니라) 행한 사람인 반면에(24절),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지만(믿지만) 행하지 않은 사람이다(26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있으되, 행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결정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행함 있는 믿음’은 구원을 얻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얻지 못함을 알 수 있다.

3) 마태복음 25:31-46

마태복음 25:31-46의 최후심판비유에서 예수님은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37절에서 양과 같은 사람들은 인자(31절) 즉 주님을 향하여 ‘주여’(Kyrie)라고 부른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44절에서 염소와 같은 사람들도 주님을 향하여 ‘주여’(Kyrie)라고 부른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여기에서 우리는 양과 같은 사람들이나 염소와 같은 사람들 모두 인자 즉 주님을 향하여 주여(Kyrie) 라고 부르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Kyrie) 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루터의 구원론에 의하면 양과 같은 사람들이나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가졌으므로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후심판비유는 양과 같은 사람들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절) 즉 구원을 얻는 복을 받지만,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절) 즉 구원을 얻지 못하고 저주를 받는다.

행함 있는 믿음: 양과 같은 사람들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절)고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향함 없는 믿음: 반면에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2-43절)고 주님께서 꾸중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지옥불에 들어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인도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믿음이다. 이 비유에서 어떤 종류의 믿음이 구원으로 인도하고 어떤 종류의 믿음이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가? 마태복음 7:21; 24-27에서와 마찬가지로 ‘행함 있는 믿음’이 구원으로 인도하고, ‘행함 없는 믿음’이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4) 고린도전서 6:8-11

고린도전서 6:8-10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1-7절(특히 4절: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에서 말하는 고린도 교인들이다. 예수님을 ‘주’(Kyrios)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되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행함도 있는 사람들이다.

행함 없는 믿음: 믿음을 가지고 있되 행함이 없는 사람들은 8-10절에서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불의를 행하고, 속이고, 음행하고, 우상 숭배하고, 간음하고, 탐색하고, 남색하고, 도둑질하고, 탐욕을 부리고, 술 취하고, 모욕하고 속여 빼앗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바울은 두 번이나 경고한다(9,10절). 이 사람들은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행함이 없기 때문에, 불의를 행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는 사도다(로마서 3:26-28; 갈라디아서 2:16). 그런데 고린도전서 6:8-10에서 바울은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행함이 없으면, 불의를 행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이 말한다.

행함 있는 믿음: 믿음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행함도 있는 사람들이다. 11절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한 때는 불의를 행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였으나,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어 더 이상 이런 불의한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회개하고 씻은 사람들이요, 행함으로 거룩하고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행함도 있는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6:8-11에서도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하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되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이다. 이 사람들은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행함이 없기 때문에, 불의를 행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행함도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의롭다고 인정받는 행함도 있는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5) 고린도전서 13:2

고린도전서 13:2에서도 두 종류의 믿음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행함(사랑) 있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행함(사랑) 없는 믿음이다.

행함 없는 믿음: 먼저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2절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루터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얻는다”는 구원론에 의하면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데,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 즉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믿음이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믿음 없이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전서 13:2에서 믿음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에 더하여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함을 고전 13:2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 즉 행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구원의 조건인 사랑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3:4-7에서 15가지로 사랑을 정의한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이 15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사랑이 없는 상태란 15가지 사랑의 반대로 하는 것일 것이다. 15가지 사랑의 반대모습은 어떤 것일까? 15가지 사랑을 그 반대로 기술해보자.

“오래 참지 않으며, 온유하지 않으며, 시기하고, 자랑하며, 교만하며, 무례히 행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성내며, 악한 것을 생각하며, 불의를 기뻐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참지 않으며,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며, 모든 것을 바라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견디지 않는다.”

만약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15가지 사랑이 없는 사람이 우리 옆에 있다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괴롭겠는가? 지옥일 것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이 있을까? 우리는 이런 기독교인들을 우리 주위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런 기독교인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것을 보고 고전 13장을 쓴 것이다. 고전 5:1-13; 6:8-10에서 이런 기독교인이 고린도교회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행함 있는 믿음: 다음으로 행함 있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고전 13장에서 행함 있는 믿음이란 사랑이 있는 믿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고린도전서 13:4-7에서 바울은 사랑을 15가지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믿음과 함께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들,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은 있으나 사랑이 없는 사람들과는 달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다. 이런 사랑 있는 믿음,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 고전 13장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한 요지이다. <계속 이어짐>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